황혼의 길목에 선다면 | 노년의 사랑, 아내의 손 그리고 삶의 마지막 온기

황혼의 길목에 선다면

황혼이 내 삶의 문턱에 닿으면, 수첩 속 이름들을 조용히 접어두리라.

청춘을 가로질러 오며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덧없는 승패와 세상의 소란도 언덕 너머로 놓아주리라.

삶의 저녁이 찾아오면 더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내 곁에 남은 단 한 사람, 아내와 함께 조용한 바다로 떠나고 싶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정말 그 바다에 서 있었다.

우리는 오래 걸었다.

말은 거의 없었다.

세월의 무게에 조금씩 떨리는 무릎과 어깨를 서로 가만히 받쳐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대화였다.

볕이 스러지는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 스치는 조개껍데기마다 지난날 우리가 주고받았던 가시 돋친 말들과 무심하게 등을 돌리던 날들이 얹혀 있는 듯했다.

돌아보면 서로에게 입힌 상처는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말없이 방문을 닫던 밤.

찌개가 식었다며 툭 던진 한마디.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산책.

상처는 늘 그런 사소한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바다가 저녁빛을 말없이 품어갈 무렵, 그 모든 기억은 노을빛에 스며들 듯 부드러워진다.

미안하다는 구구절절한 말도, 뒤늦은 변명도 필요 없다.

그저 나란히 서서 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은 서로를 용서한다.

언젠가는 우리 중 누군가가 먼저 이 모래사장에 혼자만의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남겨진 사람의 하루에는 긴 정적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다가올 이별이 두려워 지금 내리는 노을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삶의 마지막 장에 찾아올 침묵마저도 우리는 담담히 맞아들이리라.

먼 훗날 혼자 남게 되더라도 오늘 이 해변에서 나눈 온기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 고독쯤은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을 내려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어본다.

젊은 날의 매끄럽던 살결은 사라지고, 가뭄 난 논바닥처럼 굵은 주름과 도드라진 마디만 남아 있다.

그 손은 세월을 견뎌온 시간의 기록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아, 당신의 손이 이토록 따뜻했던가.
세상의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느라 거칠어진 이 손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그늘이었구나.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파도는 발자국을 지웠지만, 손끝의 온기만은 끝내 지우지 못했다.

삶의 황혼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황혼은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황혼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화려한 성공도, 수많은 인연도 아니다.

끝내 마음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손과 그 손의 온기다.

그래서 황혼은 끝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을 다시 만나는 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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