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지나간 자리

젖은 도로 위로
차 바퀴가 물을 밀어낸다.
짧은 마찰음 뒤로
비가 조금씩 가늘어진다.
골목의 이정표는
번진 먹물처럼 흐려지고,
지나온 길은 백미러 속에서
하나씩 물에 잠긴다.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것은 빗물이다.
와이퍼가 지나갈 때마다
세상은 잠시 또렷해졌다가
다시 흐려진다.
빗줄기는 지붕을 두드리고
차는 젖은 길을 계속 간다.
앞은 자꾸 맑아지는데
지나온 쪽이 더 선명하다.
비가 그친 뒤에도
와이퍼를 한 번 더 움직였다.
유리창은 깨끗했다.
지워지지 않은 것은
내 안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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