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늙지 않았다, 스무 번 넘게 찾은 제주에서 만난 나의 시간

제주도는 늙지 않았다

제주도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누군가는 제주도를 평생 한 번 가볼까 말까 하지만, 나는 스무 번도 넘게 제주를 찾았다. 대학 졸업여행, 신혼여행, 가족여행, 그리고 교사 시절 학생들과 함께한 졸업여행까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제주도가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제주에 내렸지만 이상하게도 설레지 않았다.

공항을 나와 익숙한 도로를 달리고, 수없이 지나갔던 해안도로를 바라보는데 마치 여행이 아니라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정말 내가 제주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세월이 나를 바꾸어 놓은 것일까.

내가 처음 제주도를 만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졸업여행을 떠났다.

지금처럼 저가항공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밤바다를 가르며 제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젊음은 목적지보다 출발 자체만으로도 흥분되는 법이었다.

새벽녘 제주항에 내렸을 때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검은 현무암 돌담.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귤밭의 향기.

야자수를 닮은 낯선 나무들.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

그 풍경은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그때의 제주도는 외국보다 더 낯선 섬이었다.

세상이 갑자기 넓어진 것 같았다.

몇 년 후 신혼여행도 제주도였다.

젊은 부부에게 제주도는 꿈의 여행지였다.

비싼 호텔도 아니었고 화려한 일정도 없었다.

하지만 바닷가를 걸으며 미래를 이야기하던 시간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시절에는 숙소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조차 행복이었다.

제주도는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섬이었다.

교사가 된 뒤에는 또 다른 제주를 만났다.

학생들과 함께한 졸업여행의 제주였다.

솔직히 말하면 관광보다 생활지도가 더 큰 일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가방 검사였다.

학생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교사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반드시 나온다는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가방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하면 담배가 나오고 술병이 나오고 화투가 나왔다.

학생들은 웃고 교사들은 화를 내는 척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우리도 웃음이 났다.

그 나이의 혈기가 어떤 것인지 우리 역시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점호를 마치고 복도를 순찰하던 중 창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급히 달려가 보니 믿기 어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학생 몇 명이 숙소 창문에 설치된 비상탈출용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근처 가게에서 술을 사 오려는 계획이었다.

위에서는 내려오고,

아래에서는 기다리고,

중간에서는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화가 나기보다 먼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손을 놓쳤다면.

만약 사고가 났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결국 학생들은 모두 붙잡혔고 크게 혼이 났다.

그날 밤 교사들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학생들은 단순한 장난이었겠지만 교사들에게는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때 창문에 매달려 있던 학생들도 이제는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직장인이 되었을 수도 있고, 부모가 되었을 수도 있다.

혹시 그들도 제주도를 찾을 때면 그날 밤을 떠올릴까.

창문에 매달려 식은땀을 흘리던 순간을.

복도 끝에서 달려오던 담임교사의 목소리를.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예전에 머물렀던 숙소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건물은 바뀌었고 거리의 모습도 달라졌다.

그러나 내 기억은 그대로였다.

젊은 교사가 밤새 복도를 순찰하던 모습도 보였고,

학생들이 몰래 웃으며 가방을 숨기던 장면도 떠올랐다.

신혼여행 때의 아내도 보였고,

배에서 밤을 새우던 대학생도 보였다.

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아직 제주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 깨달은 것이 있다.

제주도는 풍경을 보여주는 섬이 아니라 시간을 보여주는 섬이라는 사실이다.

해물뚝배기를 먹으면 젊은 시절이 떠오르고,

몸국을 먹으면 학생들과의 여행이 떠오른다.

보말칼국수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나고,

바닷바람 속에서는 지나간 세월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제주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제주에 남겨 둔 나의 시간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젊은 날의 나는 제주에서 낯선 세상을 보았다.

중년의 나는 제주에서 학생들을 보았다.

은퇴한 지금의 나는 제주에서 지나온 인생을 본다.

돌담은 그대로다.

바람도 그대로다.

바다도 그대로다.

어쩌면 제주도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변한 것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나이뿐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제주도를 찾을 것이다.

새로운 관광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섬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는 청년의 나,

신혼의 나,

교사였던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제주도는 늙지 않았다.

늙어 가는 것은 나인데,

그 섬은 여전히 처음 만났던 날처럼 바람 속에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을 맞으며,

내가 지나온 삶을 천천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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