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린다
강화도 시골
마당은 금세 질퍽해지고
흙길은 발목을 붙잡는다
어린 나는
장화를 신고도
자꾸만 미끄러지던 아이였다
그리고 언제나
내 오른쪽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는 똑같이 내리는데
젖는 쪽은 늘 어머니였다
나는 등을 펴고 걸었고
어머니는 조금 기울어 걸었다
그 기울기의 방향이
항상 나를 향해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의 옷 한쪽만
더 어둡게 젖어 있었다
장독대 옆에 서서
그 옷을 털어내던 모습
비는 이미 그쳤는데도
그 장면은 오래 마르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이면
나는 아직도
우산을 조금 기울인다
서울에서도
신촌의 좁은 골목에서도
아무도 곁에 없는데도
몸은 기억한다
어떤 사랑은
말이 아니라
기울기였다는 것을
신촌의 밤
비는 갑자기 쏟아졌고
우리는 작은 분식집 처마 아래
서로를 밀어 넣듯 모여 섰다
젖은 운동화
끓어오르던 라면
그리고 이유 없이 길어지던 웃음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았다
사람은
중요한 순간을 기억한다고 믿지만
나는 안다
사라질 것 같은 순간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을
첫사랑도 그랬다
신촌역 앞
짧은 신호등
비가 내렸고
우리는 말을 줄였다
“조심해서 가”
그 한 문장은
끝내 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안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남는다는 것을
비는
무언가를 더하지 않는다
덜어낸다
소리를 줄이고
세상을 흐리게 만든다
그리고 남긴다
지워지지 않는 것들만
그래서 비 오는 날의 그리움은
과거가 아니다
강화도의 흙길과
신촌의 아스팔트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가져왔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어머니의 기울기
친구들의 웃음
말하지 못한 문장 하나
나는 그것들을
잊은 적이 없다
단지
비가 올 때만
다시 보일 뿐이다
비가 그친다
신촌의 거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마르고
사람들은 다시 빠르게 걷는다
하지만
내 안의 어떤 길은
여전히 진흙이다
그래서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조금 천천히 걷는다
발이 더러워지는 대신
기억이 또렷해지는 쪽을 선택한다
비는 내린다
강화도에서 시작된 물기가
신촌까지 따라온다
그리고 나는
그 비 속에서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시간을
다시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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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지워지지 않은 인생 두 장면이군요. 하나는 비오는 날 우산을 든 어머니 모습이 어린 화자 ‘나’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던 모습이군요.
나는 등을 펴고 걸었고
어머니는 조금 기울어 걸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 오면 어머니의 한쪽 옷은 쫄딱 젖어 있었구요. 어머니는 비에 젖은 옷을 장독대 옆에서 털어내곤 하셨구요. 어머니이 자식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네요. 그 사랑은 화자에게 유전되어 지금 화자의 모습으로 나타났겠군요. 사랑의 이어짐이지요. 모두가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인 듯하군요.
두 번째 장면은 첫 사랑에 대한 장면이군요.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았다
화자는 첫사랑에 대한 강렬한 사랑 감정을 허투루 소비하지 않았군요. 그리고 내면에 차오르는 이별의 말도 하지 않았구요. 그래서 남았군요. 욕구 욕망은 소비하는 것인 듯하더요. 배 고프면 밥 먹어서, 잠 오면 잠 자 서 그 욕망을 떨쳐 버리지요. 사랑의 욕구, 욕망도 마찬가지겠지요. 더구나 엄청 강렬하였을 첫 사랑에 대한 욕망이었으니 참 참아내기 힘든 욕구를 이겨내고 마음에 그대로 두셨군요. 만약, 그 날 첫 사랑에 대한 욕망을 모두 해소했더라면 지금 첫 사랑에 대한 기억은 없을 듯하군요. 허기가 밥 먹으면 사라지듯. 잠으로 수면욕 없이 하듯. 기억에 남았어도 가물가물한 기억이 있을 테구요.
삶 중, 비가 오면 씻길 것들 씻겨 나가고 씻겨 나기지 않아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들 중 두 장면 참 감동적이네요.
선생님 시를 읽고 떠오른 시 입니다.
기울어 짐에 대하여, 문숙
한 친구에게 세상 살 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살아 보란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노처녀로만 지내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얼마 전 남편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사실도
어느 한 때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게바라도 김지하도
기울어져 세상을 보다가 혁명을 하고 시대의 영웅이 되었고
빌게이츠도 어릴 때부터 기울어진 사고로
컴퓨터 신화를 일궈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다
보들레르도 꽃을 삐딱하게 바라봐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고
피사탑도 10도 기울어져 세계적인 명물이 되었다
노인들의 등뼈도 조금씩 기울어지며 지갑을 열 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고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만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 ‘시와 정신’, 2010
울림님 반갑습니다.
밖에 비가 내리네요.
이런 날 울림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썼던 문장들이 다시 빗속으로 걸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기울어짐’을 사랑의 이어짐으로 읽어주신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어린 날에는 그저 우산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기울어진 쪽에 늘 제가 있었더군요. 말씀처럼 어쩌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받은 사랑의 방향을 닮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사랑에 대한 말씀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았다.’
돌이켜보면 이루어진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 말한 것보다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 더 오래 마음속을 떠도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욕망을 참아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끝맺지 못한 마음에는 끝내 닫히지 않는 문 하나가 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문이 슬며시 열리고요.
문숙 시인의 「기울어짐에 대하여」까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쓴 어머니의 ‘기울기’와는 또 다른 결의 기울어짐인데도 이상하게 서로 닿아 있네요. 똑바로 서 있는 것만이 잘 사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누군가를 향해 조금 기울어지는 것, 세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 어쩌면 거기에서 사랑도 시도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밖의 비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합니다.
비가 모든 것을 씻어가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씻기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긴 글로 제 글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울림님께서 오늘 남겨주신 이 마음도 다음 비 오는 날이면 문득 생각날 것 같습니다.
비 오는 하루, 마음만은 따뜻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