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휴지 수집 창고의 문이 반쯤 열린 채, 안에서 어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심코 그 앞에 발을 멈춘 나는, 창고 안에 쌓여 있을 종이 더미들보다 더 무겁고 눅진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흔히 볼 수 있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그날 그 장소는 왠지 낯설고도 익숙했다. 누군가의 삶의 기록, 지나간 시간의 흔적, 그리고 한때는 귀중했을 수많은 것들이 지금은 폐지로 분류되어 무심하게 쌓여 있었다.
그 창고를 마주한 순간, 오래전 기억 속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분은 한때 조직의 중심에 있었고, 수많은 이들의 존경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강인했고, 누구보다 단호했던 사람. 그러나 지금은 그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모두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잊힌 존재.
폐휴지처럼, 시간 앞에선 모든 것이 퇴색된다. 예전엔 금쪽같던 회의록과 보고서도 시간이 지나면 의미를 잃는다. 그 사람의 말, 판단, 결정들 역시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장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폐휴지 수집 창고는 그 모든 것의 집합체다. 삶이 퇴적되고 버려지는 자리이자, 실존이 겹겹이 눌려 있는 장소다.
우리는 누구나 삶 속에서 문을 붙잡는다. 지위의 문, 체면의 문, 인정받기 위한 문. 그 문을 열기 위해 수많은 사람과 부딪히고, 때론 서로를 밀어낸다. 나는 기억한다. 그분이 때가 되어서도 자리를 내려놓지 않을 때, 많은 이들이 말렸다. 체면을 위해 그만하라고. 욕심은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는 진심으로 그분을 위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의 안정을 위해, 우리 자리의 위태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형식적인 위로와 체면치레의 말들만 오갔다. 외면은 당당했지만, 내면은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가면을 썼다. 책임이라는 이름의 가면, 충성이라는 가면, 체면이라는 가면. 그렇게 가면을 쓴 채, 우리는 ‘그분’의 손을 놓게 만들었다.
그 가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폐휴지 창고 어딘가, 낡은 서류 더미 속에 묻혀 있는 건 아닐까. 체면 뒤에 숨긴 우리의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감히 드러내지 못했던 연민이 함께 구겨져 버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외면하고, 쉽게 잊는다.
삶은 여전히 우리를 속이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인 듯, 현재의 가치를 절대적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은 그 모든 위장을 벗겨낸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문은 닫히고, 모든 이름은 잊힌다. 중요한 건, 그 흐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남겼는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폐휴지 수집 창고는 과거만의 장소일까. 아니면 미래의 예고편일까. 언젠가 우리 모두가 이 창고의 일부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문서들, 오늘 나눈 대화, 그리고 이 순간의 표정까지도 언젠가 한 장의 종이처럼 버려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비극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유한함 속에서 삶은 빛난다.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더 진실해야 하고, 더 따뜻해야 한다. 지나고 나면 모두가 폐지처럼 눌리고 구겨질 테지만, 그 종이 안에 담긴 진심만큼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폐휴지 창고는 언제나 반쯤 열려 있다. 아무도 잠그지 않는다. 그 안에는 과거가 머물고, 현재가 스며들며, 미래가 예고된다. 나는 오늘도 그 문 앞에 선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묻어나올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문을 붙잡고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퇴적되며, 결국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폐지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더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창고는 말이 없다. 다만 그 침묵이, 그 무엇보다 진실하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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