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에 젖은 산정호수는 늘 고요했다.
붉게 물든 산이 물 위에 겹쳐 비칠 때면, 남자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풍경은 변하는데, 내 인생은 고여 있구나.
그는 쉰둘이었다.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시를 읽고 글을 쓰던 그는 교단에서 학생들과 함께 늙어가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낸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집은 텅 비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멀어졌다. 남은 건 책 몇 권과 고요한 방, 그리고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상실감뿐이었다.
여자는 서른아홉. 십여 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했고, 다시 여행사 일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씩씩했지만, 집에 들어서면 발소리만 울리는 빈 방이 그녀를 삼켰다. 그래서 그녀는 여행지마다 엽서를 모았다. 작은 종잇조각에 풍경을 붙잡아두는 일이야말로, 자기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같은 호숫가에 있었다. 서로를 모른 채, 같은 바람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그러나 바람이 책장을 덮었다. 그 순간, 여자가 카메라 셔터를 다급히 누르다 렌즈 뚜껑을 떨어뜨렸다. 뚜껑은 구르다 그의 발 앞에서 멈췄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남자는 뚜껑을 건네며 짧게 말했다.
“풍경보다 급한 게 있었나 보군요.”
여자는 순간 피식 웃었다. 그의 말투에는 교사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자주 마주쳤다. 처음에는 인사만 했지만, 곧 호수 둘레길을 함께 걸었다. 군밤 냄새가 스치고,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호수는 바다 같네요.”
“사람들이 각자의 바다를 안고 오기 때문일 겁니다.”
여자는 그 대답에서 오래 묻어둔 무언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풍경을 다르게 본다.
며칠 뒤, 안개 낀 아침에 두 사람은 작은 배에 올랐다. 호수는 길을 잃은 듯 희미했다.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그 후로 사람을 믿는 게 두려워졌습니다. 행복이란 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다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결혼 생활 내내,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인 지금이 두렵지만… 동시에 자유이기도 하죠.”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전 남편의 이름이 선명했다.
남자가 낮게 말했다.
“받지 마세요.”
그러나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통화를 눌렀다. 짧은 대화 끝에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었다.
남자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듯 끊었다.
“왜 다시 끌려가려 합니까. 이제 당신은 자유로워졌잖아요.”
여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이 뭘 알아요? 혼자 사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담담히 말했다.
“저는 혼자가 무섭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 게 무섭습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크게 흔들렸고, 둘은 서로를 붙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부딪혀버린 상태였다.
며칠 동안 여자는 호수에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책을 펴놓고 기다렸지만, 책장은 바람만 넘겼다.
짐을 싸려던 마지막 날, 그는 호숫가에서 그녀를 보았다. 손에는 낡은 엽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이 엽서를 태워버릴까 했어요. 다 잊어버리자고. 그런데 겁이 나더군요. 기억까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대신 새로운 걸 하나 채워드리면 어떻습니까?”
그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단풍잎 모양의 은빛 펜던트가 있었다.
“이건 잊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고요. 다만… 이번엔 끝까지 함께하자는 의미로.”
여자는 눈을 감았다 뜨며,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난 늘 우연을 흘려보냈어요. 그런데… 이번만은 붙잡겠습니다.”
노을이 호수에 붉게 번졌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손은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남자는 그 손을 덮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계절은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래 묻혀 있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병실 창문 너머로 가을빛이 스며들던 날, 아내는 마지막 힘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그 어떤 손도 붙잡지 못했다.
잡는 순간, 또다시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바닥 위에는 또 다른 체온이 놓여 있었다.
떨리는 손끝,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손길.
그는 알았다. 오래 붙잡아두었던 두려움을 이제야 비로소 내려놓았다는 것을.
여자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 손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어요.”
남자는 낮게 웃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얼어 있었던 겁니다. 당신 덕분에 다시 녹고 있어요.”
멀리서 배가 지나가며 호수 물결이 일렁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바람이라 여겼을 테지만, 산정호수는 알고 있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그의 마음이, 마침내 다시 열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 가을에, 두 사람의 삶이 비로소 뒤집혀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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