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꽁트

🎭 일탈, 그 작고 소심한 반란

by 선비천사 2025. 4. 17.

 

 

– 머리핀 사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침 8시 12분.
늘 그렇듯 나는 출근 시간의 3분 여유를 부여잡은 채, 약간의 숨가쁨과 함께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서 있었다.
흰 블라우스, 회색 스커트.
그리고… 머리핀.
딱히 눈부신 것도,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날따라 햇살이 그 머리핀에만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닫히는 문입니다.”

삐익—

문이 닫히고, 4층에서 11층까지의 짧고 긴 여정이 시작됐다.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박자 빨리 뛰었다.
아니, 그건 계단을 뛰어 올라온 탓이었을까?
그녀의 옆모습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녀의 머리핀을 힐끔거렸다.

 

‘예쁘다’

 

입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평생 그런 말 해본 적 없다.
예쁘다는 말은 TV 속 주인공들이나 하는 줄 알았다.
내 입에서는 어색하고, 쑥스럽고, 조금은 무례할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살아온 나였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머리핀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내가 말했다.
정말 말했다.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내가 더 놀랐다.
마치 평생 꽉 닫혀 있던 벽장문이 삐걱이며 열린 것처럼.
바람이 휙 들어온 것처럼.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
그리고 다시 정면.


1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 복도로 걸어갔다.
말 한마디만 남기고, 우리는 각자의 하루로 되돌아갔다.
같은 회사도 아니고, 같은 팀도 아니고,
그냥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그날의 동승자였을 뿐.

하지만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내가 조금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점심시간엔 오랜만에 밥이 맛있었고,
팀장의 잔소리에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퇴근길엔 오래된 단골 빵집에 들러
크림 가득한 소보로 빵을 하나 샀다.
‘이런 날은 좀 달달해도 되지’ 하면서.


그날 밤,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야, 너…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었구나.”


이게 바로 내 소심한 일탈.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그러나 내 안의 오래된 침묵을 깨뜨린 작은 반란.

세상은 그걸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알았다.

그날, 나는 좀 다르게 살았다.
그날만큼은, 정면만 보며 살지 않았다.


 

🎭 그녀의 이야기 — “그 한마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출근길에 우유 한 병을 떨어뜨렸고,
블라우스는 다림질이 덜 된 걸 입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나마 괜찮은 걸 하나 고르라면,
이 머리핀이었다.
그것도 딱히 새것은 아니었다.
2년 전에 친구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건데,
요즘은 뭔가 예쁘게 꾸밀 힘도 없어서
그냥 무심코 집어 꽂고 나온 거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옆에 누가 탄 건지는 잘 보지도 않았다.
서류를 정리하느라, 머릿속은 온통 미팅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머리핀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순간, 이상하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머리핀?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점퍼에 단정한 셔츠.
눈을 바로 마주치진 않았지만,
뭔가 이상하게 진심 같았다.

어디서 배운 멘트 같지도 않고,
사심이 느껴지지도 않는 그 말투에
그녀는 살짝 웃고,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날 그녀는 하루 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길을 걷다 문득 웃음이 났고,
커피숍에서는 평소보다 한 잔 더 마셨다.
오후엔 팀장한테 한 소리 듣고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머리핀 하나에도 누군가 눈길을 준다는 것.
그 작은 한마디가
하루를 바꾸기도 한다는 걸
그녀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혼잣말을 했다.

“그 사람… 눈썰미 괜찮네.”


세상은 아주 작고 조용한 말 한마디로
가끔은 따뜻해진다.
그녀에게 그날은
머리핀보다 말이 더 예뻤던 날이었다.

 

 

 

*관련글 보기

https://sunbicheonsa.com/154

 

“산정호수에서 다시 찾은 사랑, 중년의 로맨스”

가을빛에 젖은 산정호수는 늘 고요했다.붉게 물든 산이 물 위에 겹쳐 비칠 때면, 남자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풍경은 변하는데, 내 인생은 고여 있구나. 그는 쉰둘이었다. 오랫동안 고등학교에

sunbicheonsa.com

 

반응형
LIST

'꽁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정호수에서 다시 찾은 사랑, 중년의 로맨스”  (59)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