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과 삶의 변화, 빈자리에 계절이 머문다

빈자리에 계절이 머문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친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귀가 먹먹하도록 울어대던 매미 소리는 간곳없다. 베란다 너머 소래산 자락에서는 풀벌레 울음이 낮게 번지며 그 빈자리를 채운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아파트 마당에는 아침부터 이삿짐 사다리차 한 대가 서 있다. 기다란 사다리가 아파트 벽을 따라 하늘로 뻗어 있다. 장롱이 내려오고, 소파와 탁자가 뒤따른다. 한집의 살림이 허공에 매달린 채 하나씩 땅으로 내려온다.

오래 베란다를 지켰을 법한 화분도 보인다. 이삿짐 사이에 놓인 화분의 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누군가는 정든 삶의 자리를 떠나고, 그 빈자리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살림이 들어올 것이다.

사다리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다.

계절도 사람도 저렇게 자리를 바꾸는 것일까.

문득 내 지난날이 떠오른다.

치열하게 일터를 누비며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아침이면 출근했고 저녁이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또 한 해를 밀어냈다.

청춘은 오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마흔을 넘어 쉰이 되고, 어느새 예순의 고개마저 넘어섰다. 정들었던 책상 위 서류가 하나둘 치워지듯 나도 세상의 중심에서 조금씩 물러나 있었다. 열정이 머물던 자리에는 어느새 나이 든 내가 서 있다.

돌아보면 나는 지나간 시간을 오래 붙잡고 살았다.

한때 나를 설명해 주던 작은 성취와 이름 뒤에 붙던 직함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이미 멀어진 인연을 되짚었고, 끝난 선택 앞에서 “그때 다른 길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묻기도 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을 할수록 지나간 시간은 더 선명하게 돌아왔다.

어쩌면 사람은 충분히 아쉬워하고 나서야 한 시절을 떠나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집 근처 산자락을 따라 걸었다.

길가의 강아지풀은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낮췄다가 다시 일어섰다.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내주었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무도 여름 내내 품었던 짙은 초록을 조금씩 거두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푸르던 잎 끝이 어느새 빛을 잃었다. 잎 하나가 흔들리다가 가지를 떠났다.

나무는 떠나는 잎을 붙잡지 않았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살아보니 손에 쥐는 것보다 손을 펴는 일이 더 어려웠다. 사람도, 자리도, 지나간 시간도 그랬다.

거울 속 얼굴도 예전과 다르다. 주름은 깊어졌고 머리숱은 전보다 성겼다. 한때는 그런 변화가 서글펐다. 하지만 오래 들여다보니 그 얼굴도 결국 내가 살아온 시간이었다.

나이 듦은 잃어가는 일만은 아니었다.

빨리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것을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 앞에 멈추고, 다른 사람의 말을 조금 더 오래 듣게 되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삿짐은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마지막 상자가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잠시 뒤 하늘까지 뻗어 있던 사다리가 접혔다. 조금 전까지 부산스럽던 마당이 금세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어 위층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빈집도 오래 비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밥 냄새가 나고, 어느 저녁에는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내가 떠나온 자리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오늘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제는 지나간 날들을 향해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당겨 걱정하지도 않으려 한다.

오늘 아침 피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느낀다. 밤이면 창가까지 번져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예전에는 너무 바빠 듣지 못했던 소리다.

삶의 변화는 언제나 무언가를 데려가지만, 그 빈자리에는 또 다른 시간이 들어온다.

청춘이 물러난 자리에는 조금 느려진 걸음이 남았다. 치열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세상을 오래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떠나보내는 일이 꼭 잃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창밖으로 다시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나뭇잎 몇 장이 흔들린다. 이삿짐 차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 빈자리를 한동안 바라본다.

지나간 것을 붙잡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계절은 그렇게 떠나고 또 온다.

바람은 지나갔지만 마음에는 무언가 남아 있다.

나는 창문을 조금 더 열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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