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은 한 번도 먼저 걸어온 적이 없다.
늘 내가 걷다가 멈춰 선 자리에
원래부터 있었다는 듯 서 있을 뿐.
손뼉을 치듯 벽을 치면
내 손바닥만 아프다.
주먹을 거두고 가만히 서면
긴 그늘이 발끝까지 내려온다.
온몸이 까닭 없이 무거운 날,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 소리 돌아오지 않는 날,
나는 벽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은 거기서 멎었고
지친 등은 말없이 기대었다.
나를 막아선 벽이
때로는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벽은 길의 끝이 아니었다.
멈춰 선 내가
끝이라고 믿었을 뿐.
그 단단한 이마에
나의 이마를 가만히 대고
한동안 숨을 고른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선다.
포기하려고가 아니라,
넘어갈 자리를 찾으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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