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살고 있는 코끼리에게|믿음과 위로에 관한 문학수필

 

주방 구석에 오래된 냉장고가 한 대 있다.

낮에는 별다를 것 없는 냉장고다. 손때 묻은 손잡이와 작은 흠집 몇 개가 있고, 문을 열면 반찬통과 보리차 병, 달걀 몇 알이 보인다.

하지만 밤이 되면 조금 달라진다.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나면 냉장고는 일정한 간격으로 웅웅거린다.

웅―.

잠시 고요해졌다가 다시,

웅―.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오래 듣고 있으면 그것은 기계음이 아니라 숨소리처럼 들린다.

아주 크고 느린 짐승이 좁은 곳에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쉬는 소리.

그래서 어느 날 생각했다.

어쩌면 내 냉장고 안에는 코끼리 한 마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웃었다.

코끼리가 어떻게 냉장고에 들어가느냐고 했다. 냉장고의 크기와 코끼리의 몸집부터 비교해 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을 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냉장고 안에는 먹다 남은 반찬과 보리차가 있다. 냉동실에는 언제 넣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음식들이 딱딱하게 얼어 있다.

코끼리가 들어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나는 가끔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 멈춘다.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기다린다.

혹시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지 않을까.

커다란 귀가 반찬통을 건드리거나 긴 코가 보리차 병 사이를 지나가지는 않을까.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바로 문을 열지는 않는다.

문이 닫혀 있는 동안에는 코끼리가 있을 수 있으니까.

내가 상상하는 냉장고 속 코끼리는 특별한 능력이 없다.

나를 구해주지도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지도 않고, 내일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이미 아픈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에 있다.

거대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차가운 냉장고 안에서 천천히 숨을 쉰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살다 보면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날.

기다리던 연락이 끝내 오지 않은 날.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가슴에 남아 밤까지 따라오는 날.

그런 날에는 행복하다는 말을 억지로 하고 싶지 않다.

차가운 것은 차갑다고 말하고 싶다.

아픈 것은 아프다고 인정하고 싶다.

냉장고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온다.

그 냉기를 따뜻하다고 우길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차가운 곳에도 누군가 함께 있다고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나는 가끔 코끼리가 걱정된다.

저 안은 추울 텐데.

코끼리도 추위를 타는지는 모르겠다.

먹을 것은 무엇을 먹을까.

사과를 하나 넣어두면 먹을까.

내가 밤늦게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조금 우습다.

힘든 사람은 나인데 어느새 나는 코끼리를 걱정하고 있다.

사과를 하나 남겨둘까 생각하고 있다.

내 슬픔만 들여다보던 눈이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냉장고는 계속 웅웅거린다.

웅―.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내일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남아 있다.

떠난 사람이 돌아온 것도 아니고, 실패한 일이 성공으로 바뀐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밤은 조금 덜 길어진다.

나는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하는 순간 코끼리는 너무 작아질 것 같아서다.

어쩌면 믿음은 사실을 바꾸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대로인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여백인지도 모른다.

냉장고 안에 코끼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확인하려면 문을 열면 된다.

하지만 나는 확인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확인해서 알게 되는 것이 있고, 확인하지 않아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밤이 깊었다.

목이 말라 식탁에서 일어났다.

주방에는 냉장고 위의 작은 불빛만 켜져 있었다.

나는 냉장고 앞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때였다.

웅―.

냉장고가 낮게 울었다.

나는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물을 마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신 식탁 위에 있던 사과 하나를 집어 냉장고 앞에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이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웅―.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코끼리가 이제 막 잠든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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