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논두렁을 따라 걷습니다.
여름 내내 발목까지 차오르던 논물은 거의 빠졌습니다. 물이 물러난 자리에는 검게 젖은 흙이 드러나 있습니다. 얕은 물웅덩이 몇 개가 늦은 햇빛을 붙잡고 있습니다.
벼도 많이 익었습니다.
여름에는 위로만 솟던 줄기가 이제는 아래를 향합니다. 이삭마다 알곡이 들어찼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마른 잎과 이삭이 서로 몸을 비빕니다.
사각사각.
익어가는 것들에게도 소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삭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봅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달린 것치고는 제법 묵직합니다.
손바닥에 닿은 그 무게 때문에 오래전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아버지는 논 한가운데 들어가 이삭을 몇 알 훑었습니다. 손바닥에 놓고 엄지손톱으로 벼알을 눌러보는 것이 늘 하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손이 싫었습니다.
손톱 가장자리에는 늘 검은 흙이 끼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논바닥처럼 잔금이 많았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손을 내밀면 괜히 내 손을 주머니에 넣곤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한번은 물었습니다.
“평생 이렇게 일해서 남는 게 뭐예요?”
도시로 나가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앞으로 가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논보다 높은 건물에서 일하고, 흙 묻은 신발보다 반짝이는 구두를 신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허리를 숙여 이삭 하나를 훑었습니다.
손바닥에 떨어진 벼알 몇 개를 엄지손톱으로 눌러보더니 말했습니다.
“아직 멀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벼가 익었느냐고 물은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또 벼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아버지 손바닥에 있던 벼알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는 오래 남았습니다.
아직 멀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에게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이 생겼습니다.
끝까지 해야 하는 일이 생겼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미룬 날도 있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늦게 한 적도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자유란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벼워야 멀리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삶의 무게는 반드시 버려야 할 짐만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오래 사랑하는 일에도 무게가 있습니다. 한자리를 지키는 일에도 무게가 있습니다. 말없이 책임지는 일에도 무게가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버리면서 가벼워지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품으면서 비로소 자기 자리를 갖기도 합니다.
다시 이삭을 바라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들 말합니다. 나는 이제 그 말에서 겸손이라는 교훈을 찾지 않습니다.
벼는 겸손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에 알곡이 찼기 때문에 기울 뿐입니다.
여름의 햇빛과 비를 지나왔고, 수없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그 시간이 빈 껍질 안에 하나씩 들어찼습니다.
벼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높이 올라가는 것만 성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성장에는 높이가 아니라 무게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왜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어쩌면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날의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해가 산 아래로 기울자 가을 논두렁의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논물이 빠진 바닥에서는 낮 동안 머금었던 온기가 올라옵니다. 따뜻한 흙냄새가 저녁 공기에 섞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몇 걸음 걷다가 손을 펴봅니다.
손바닥에 벼알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이삭을 만질 때 떨어진 모양입니다.
엄지손톱으로 눌러보려다가 그만둡니다.
문득 아버지의 손이 생각납니다.
손톱 가장자리의 검은 흙과 논바닥처럼 갈라졌던 손등. 내가 잡기 싫어 주머니 속으로 숨겼던 그 손이 이제는 이상할 만큼 선명합니다.
벼알을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습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다가 그것을 다시 발견합니다.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주 작은 벼알 하나입니다.
한때 나는 아버지에게 무엇이 남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래 지나고 보니 질문만 그대로 돌아와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책상 위의 벼알을 한참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대답을 알아들을 때까지 견뎌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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