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끝자락, 베란다 구석에서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제라늄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렸다.
잎 몇 장은 누렇게 말랐고 줄기도 가늘었다. 그런데 꽃만은 이상하리만큼 붉었다. 살아 있다는 증명이라기보다 남은 힘을 한곳에 모아 켜놓은 작은 등불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 꽃을 바라보았다.
사랑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는다. 밥을 같이 먹을 사람, 늦은 밤 전화를 걸 사람,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어쩌면 사랑은 외로움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핑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까워진다고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끝내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오래 함께 살아도 건너지 못하는 마음의 거리가 있다. 사랑은 그 거리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거리를 견디며 곁에 머무는 일에 가깝다.
오래전, 한 사람과 낡은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몇 번을 끓였는지 찌개는 졸아 있었다. 우리는 별말 없이 숟가락만 움직였다. 그릇에 부딪히는 쇠붙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사람이 찌개 속 두부 한 조각을 건져 내 그릇에 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 작은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랑한다는 말도 없었고 뜨거운 눈빛도 없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사랑은 어쩌면 그런 것이었다.
자기 몫에서 무엇인가 조금 덜어 상대의 그릇에 놓아주는 일.
문제는 그 ‘조금’이 쌓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을 원한다. 관심을 원하고 이해를 바라며 때로는 희생까지 기대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마음에 너무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당신을 사랑한다면서 당신의 시간을 탐냈고, 당신의 침묵까지 내 방식으로 해석했다. 당신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는 당신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 역시 당신에게 조금씩 닳아갔다.
당신 때문에 버린 고집이 있었고, 삼킨 말이 있었으며, 당신이 아플 때 대신 아플 수 없어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갔고, 동시에 무언가를 내주었다.
누가 더 많이 잃었는지는 이제 계산할 수 없다.
어쩌면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먹고 자라는 일이 아니다. 서로 조금씩 자신을 내어주면서 함께 살아남는 이상한 생존 방식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람을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족한 곳을 들춰낸다.
그래서 우리는 다가갔다가 상처 입고, 물러났다가 다시 손을 내민다. 그 서툰 왕복 속에서 이전과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며칠 뒤 제라늄 꽃이 졌다.
붉은 꽃잎 몇 장이 베란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빗자루를 가져오려다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꽃이 떠난 자리 아래에서 작은 새잎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다.
연둣빛이었다.
꽃을 피우느라 지쳤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꽃이 졌다고 생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랑도 그랬다.
누군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 때문에 생겨난 나도 있다.
혼자였다면 몰랐을 기다림이 있고, 고치지 않았을 고집이 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비로소 알게 된 슬픔도 있다.
사랑하고 난 뒤의 우리는 사랑하기 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떨어진 꽃잎을 주워 화분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 꽃은 이미 졌다.
그 아래에서 새잎 하나가 조용히 몸을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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