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수지 둑방은 오래전에 흙을 잃었다
비가 와도 시멘트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는 구두 굽으로 마른 둑방을 두드리며 걸었다
언덕 아래 옥수수밭이 검게 흔들렸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들이 서로의 몸을 긁었다
서석서석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오래 굶은 짐승의 숨소리 같기도 했다
붉은 빛이 천천히 밭 위로 번졌다
한때는 저녁마다 저 빛 속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는데
이제 나는 언덕 위에만 서 있었다
마당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여름을 따뜻했다고 말하지만 내가 먼저 기억하는 것은 짚 끝의 까칠한 감촉이었다
등을 대면 살갗이 조금씩 따끔거렸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할머니 무릎이 등을 받쳐주었다
무릎뼈는 마르고 단단했다
가볍게 흔들리는 부채 축축한 저녁 공기 귓가를 맴돌던 모기 소리
할머니는 말없이 부채질을 오래 했다
나는 그 무릎 위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바가지 하나
김 오르는 감자와 옥수수에서 솥의 그을음 냄새가 났다
식구들은 말없이 앉아 옥수수를 씹었다
알갱이가 이 사이에서 터질 때마다 잠깐씩 웃음이 흘렀다
뜨거운 감자를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쥐며 누군가 낮게 웃으면 어둠도 잠시 물러나는 것 같았다
그 여름밤에는 옥수수를 씹는 소리와 사람들 숨소리가 마당 가득 천천히 퍼졌다
밤이 깊으면 별똥별이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는 그 연기가 허공 속으로 천천히 흩어지는 걸 바라봤다
빛나는 것들은 왜 모두 사라지는 쪽으로만 가는지 어린 나는 오래 생각했다
별똥별이 사라진 자리에는 늘 더 깊은 어둠이 남았다
멍석은 삭아 없어지고 바가지는 깨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먼 곳으로 갔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냄새와 몇 번의 웃음소리와 옥수수 잎이 서로를 긁던 저녁의 마찰음뿐이다
저수지 물은 여전히 검고 깊다
나는 한참 동안 물가에 서 있었다
물속에서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시멘트 길을 내려왔다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은 대개 아주 조용한 소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관련글 보기
시흥 거북섬 여행, 시화호를 바라보며 먹은 보리밥 한 그릇과 도시의 시간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