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시장에서 배운 사랑 | 장바구니와 붉은 자국의 수필

평생 교단에서 분필을 쥐고 살았다.
칠판 위에는 늘 문장이 있었다.
원인과 결과, 역사와 인간의 선택.

나는 그 문장들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은퇴 후
내 손에는 더 이상 분필이 없다.

대신 장바구니가 있다.

오후 시장은 늘 시끄럽다.

생선 좌판에서는 은빛 비늘이 번쩍이고
채소 가게에서는 흙 묻은 무들이 묵직하게 쌓여 있다.

“아저씨, 오늘 고등어 좋아요.”
“쪽파 한 단 더 가져가세요.”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춘다.

만원짜리 한 장을 쥔 채
무를 살까
쪽파를 살까
잠깐 계산한다.

예전에는 큰 결정을 많이 했다.

학생의 진로
시험 문제
역사의 해석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은 작다.

무 한 개
쪽파 한 단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작은 선택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장을 다 보고 나오면
비닐봉지 끈이 손바닥에 파고든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가끔 그 자국을 들여다본다.

손바닥에 붉은 줄이 몇 개 남아 있다.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장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오늘 저녁의 국 냄새와
식탁 위의 웃음이
이미 적혀 있다.

시장 골목을 지나면 반찬가게가 나온다.

유리 진열대 안에
나물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다.

고사리
시금치
멸치조림

사람들은 잠깐 줄을 선다.

카드 한 번 긁으면
오늘의 저녁이 준비된다.

그 모습이 낯설지는 않다.

세상은 늘 바쁘다.
사람들은 늘 피곤하다.

다만 가끔
생각이 난다.

부엌이라는 곳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은 늘 시끄러웠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뚜껑을 여는 소리
국이 끓는 냄비의 숨소리

그리고 그 가운데
어머니가 있었다.

특별한 요리는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형이 두부를 좋아한다는 것
내가 감자조림을 좋아한다는 것
아버지가 고등어를 먹으면 밥을 더 드신다는 것

어머니는 그것을
손으로 기억했다.

나는 이제 시장에서
그 기억을 조금 흉내 낸다.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생선

가끔은 마음이 커진다.

평소에는 지나치던
한우 코너 앞에서
잠깐 발걸음이 멈춘다.

장바구니에 넣는 순간
심장이 조금 빨리 뛴다.

돈을 쓰는 기쁨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몸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면
부엌이 조금 어수선해진다.

칼질이 서툴러
파 조각이 도마 위에 흩어지고
냄비에서는 국물이 넘친다.

그래도 저녁이 되면
식탁 위에 음식이 놓인다.

“참 맛있다.”

그 한마디가 들리는 순간
나는 오늘 하루의 일을 마친 것 같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해가 시장 골목 끝에서
천천히 기울고 있다.

손바닥에는 여전히
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비닐봉지 끈이 남긴 선이다.

나는 그 선을 잠깐 바라보다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고르는 일.

어쩌면 삶은
그 일을 오래 반복하면서
조용히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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