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데기를 위한 변명

가을 마당에서는
바람이 곡식의 운명을 갈랐다
풍구가 돌아가면
무거운 알곡들은 멍석 위로 떨어지고
가벼운 왕겨들은
마당 끝으로 밀려났다
나는 오래도록
그 가벼운 것들이 슬펐다
알곡은
독 안에 담겨 겨울을 건너갔지만
껍질은
아궁이 속에서 먼저 타들어 갔다
하얀 연기만 남긴 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껍질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
속을 지키던 것이었다는 걸
여름의 햇빛과
밤새 내린 비와
새벽 서리를 먼저 받아낸 것은
언제나 바깥이었다
속은
누군가의 마름과 닳음 속에서
천천히 영글었다
게는 자라기 위해
자기 몸을 벗는다
딱딱한 외피를 찢고 나온 몸은
잠시
물살에도 흔들린다
그 연약한 시간 이후에야
새로운 껍질이 생긴다
성장은
단단해지는 일이 아니라
몇 번의 벗겨짐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겨울 새벽
장독대 곁에 선 어머니의 손등은
늘 갈라져 있었다
터진 마디에는
광목천이 감겨 있었고
손에서는
된장과 연탄재와
찬바람 냄새가 났다
서울로 떠나는 자식의 가방에는
마른 반찬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지만
어떤 어머니들은
평생 자식의 껍질로 살아간다
당신의 저고리 소매 끝은
해마다 먼저 닳아갔다
나는 뒤늦게 알았다
내가 희어지는 동안
누군가는 먼저 거칠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따뜻했던 이유가
누군가의 체온이 닳아갔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세상은 늘
빛나는 알맹이를 기억한다
그러나 어떤 생은
끝내 이름 없이
껍질로 남는다
집의 벽처럼
옷의 소매처럼
교실의 분필가루처럼
교단에 서 있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각자의 도시로 떠나
의사가 되고
연구원이 되고
저마다 단단한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내 목소리는 천천히 갈라지고
칠판 위의 분필 자국처럼
청춘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삶은 허무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오래 품고 있던 사람만이 아는
조용한 안도 같은 것이 있었다
가을이 지나간 들판에는
빈 콩깍지들이 남아 있다
속은 떠나갔지만
그 자리에는 아직
햇빛과 비와 바람의 시간이 묻어 있다
어쩌면 사랑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끝까지 자신을 남김으로써
누군가를 익게 하는 일
그러니
세상의 바람이여
가벼운 것들을 먼저 쓸어가지 말아라
지상의 부드러운 것들은
대개
누군가 먼저 닳아준 자리에서
살아남았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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