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숨이 턱 막히는 공기, 달아오른 아스팔트,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열기. 무더위는 몸만 지치게 하지 않는다. 마음 깊숙한 곳까지 천천히 젖게 만든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도시는 거대한 가마솥처럼 끓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그늘 하나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 역시 더위만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래 쌓인 피로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발길이 향한 곳이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뒤편의 작은 소나무숲이었다.
∞
동산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오는 바람은 도시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전혀 달랐다. 도시의 바람이 뜨거운 숨결이라면, 이곳의 바람은 깊은 우물에서 막 길어 올린 찬물 같았다.
나는 오래된 벤치 하나를 골라 조용히 앉았다.
등을 기대는 순간, 하루 종일 몸에 들러붙어 있던 열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
어디선가 쓰르라미가 울고 있었다.
짧고도 길게 이어지는 울음이었다.
한여름에만 들을 수 있는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속 오래된 기억을 흔든다. 소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햇빛은 잎 사이를 지나 벤치 아래에 초록빛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혼자였는데,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같았다.
∞
살다 보면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
그것은 오래전 헤어진 사람일 수도 있고,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일 수도 있다. 어떤 날은 지나간 시간이고, 어떤 날은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이기도 하다.
내게 그 존재는 늘 바람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면 사라질 것 같고,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끝내 붙잡을 수 없는 존재.
그러나 분명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존재.
∞
나는 숲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살아오면서 쌓인 피로.
괜찮은 척 웃어야 했던 날들.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외로움.
사람들은 대개 아픔을 감춘 채 살아간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라 믿지만, 감춰 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용히 사람 안에서 자리를 넓혀 갈 뿐이다.
그날의 나는 처음으로 그 마음을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다.
∞
바람은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소나무 가지를 흔들었고, 얼굴을 스쳐 지나갔으며, 땀으로 젖은 셔츠를 식혀 주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사람은 언제나 말로 위로받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날 내게 바람은 그런 존재였다.
∞
나는 문득 깨달았다.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었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사람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이 외로움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다.
땀 냄새와 먼지, 조급함으로 가득했던 하루가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사람은 거창한 행복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여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나무 향기.
잠시 쉬어 갈 벤치 하나.
그리고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존재.
어쩌면 삶은 그런 작은 것들 덕분에 다시 시작된다.
∞
사랑도 다르지 않다.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바람 한 줄기를 남겨 주는 일이다.
잠시 스쳐 지나가더라도 오래 기억되는 것.
붙잡을 수 없어도 삶을 바꾸는 것.
그래서 사랑은 바람과 닮았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사람을 살린다.
∞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쓰르라미 울음은 조금 더 깊어졌고, 숲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나는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올라올 때와 내려갈 때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내려놓았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동산 아래로 내려오자 다시 도시의 열기가 느껴졌다.
자동차 소음이 들렸고, 신호등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소나무숲을 돌아보았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존재했다.
살아가면서 사람을 끝내 버티게 하는 힘도 어쩌면 그와 같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잡을 수 없지만 평생 기억되는 것.
그날 이후 삶이 버거울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그 벤치에 앉는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뒤편 소나무숲.
쓰르라미 울음이 숲을 채우고, 바람이 조용히 지나가던 그 여름 오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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