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밤 컴퓨터 화면을 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공간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커서 하나가 천천히 깜빡인다.
빛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아무 소리도 없지만
그 작은 움직임은 시간을 표시하는 신호처럼 보인다.
나는 종종 그 커서를 한동안 바라본다.
문장을 시작하려고 앉았지만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키보드 위에 올려 둔 손가락이 잠시 멈춰 있는 동안에도 커서는 같은 속도로 계속 깜빡인다.
내가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화면 위의 작은 막대는 자기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 깜빡임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커서가 몇 번만 움직여도 무엇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문장 하나를 시작하지 못하면
하루가 어딘가에서 멈춰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도 억지로 단어를 적어 넣곤 했다.
서툰 문장이 화면 위에 남아 있으면 마음이 조금 안심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나는 그 깜빡임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커서는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신호가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표시처럼 보였다.
내가 문장을 쓰든 쓰지 않든
하루는 자기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창밖을 보면 계절도 비슷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뭇가지 끝에 조그맣게 매달려 있던 꽃잎이
어느새 바닥에 흩어져 있다.
아침 공기에는 흙냄새가 조금 섞여 있고
저녁이 되면 바람이 창문 틈을 오래 지나간다.
특별히 붙잡지 않아도
계절은 자기 순서대로 움직인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몸도 그렇다.
글을 쓰지 않는 날에도
배는 고프고
밥을 먹으면 졸음이 찾아온다.
머리는 멈춰 있는 것 같은데
몸은 여전히 시간을 지킨다.
부엌에서는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오고
식탁 위에서는 숟가락이 접시에 닿는 작은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여전히 하루의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녁이 되면 집 안의 공기가 조금 따뜻해진다.
아이 방 문이 열리고
아이가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장난감을 굴린다.
작은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천천히 방 안을 돌아다닌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 소리를 듣다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다.
그 순간에는 특별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만 남는다.
밤이 깊어지면 집 안은 다시 조용해진다.
부엌 불이 꺼지고
창밖 자동차 소리도 하나씩 멀어진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컴퓨터 화면을 켜면
처음과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빈 화면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깜빡이는 커서.
나는 문득 그 커서를
글쓰기의 시작이 아니라
삶의 신호처럼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의미 있는 문장을 쓰지 못하는 날에도
그 작은 신호는 계속 이어진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시간은 자기 리듬을 잃지 않는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거창한 문장이 쓰이지 않는 날이 더 많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빈 화면 위에서
커서가 계속 깜빡이듯이
우리의 시간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나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지금 어떤 문장이 시작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화면 위에서는
여전히 작은 신호가 깜빡이고 있다.
빛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그 깜빡임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직
오늘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내 삶의 문장도
그 커서 뒤 어딘가에서
조용히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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