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의 나뭇결|퇴직 후 마주한 인정욕구와 자유에 대한 문학수필

목마의 나뭇결

 

퇴직 후 거실 창가에 원목 책상을 들여놓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30여 년의 긴장을 내려놓았다는 해방감, 정년이라는 성문의 파수를 마치고 비로소 나만의 영토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집 안 가득 번졌다.

그 책상은 내게 전리품과도 같았다.

결재판과 분주한 업무 대신, 이제부터는 사색과 글을 올려놓으리라 다짐하며 나는 오래도록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트로이의 비극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던 바로 그 밤에 시작되었다.

적이 떠나간 백사장에서 성 안으로 들여온 거대한 목마처럼, 퇴직 후 내 삶으로 들여온 원목 책상도 어느새 내 안의 목마가 되어 서늘한 정적을 품기 시작했다.

평화가 들어온 줄 알았지만, 성문으로 밀려든 것은 공허와 조바심이었다.

소속을 내려놓은 자리에 찾아온 침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 공허를 견디지 못한 나는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 불빛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새로 올린 글의 조회 수를 헤아리고, 타인의 반응에 마음을 졸이며, 여전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붙잡았다.

나는 자유를 얻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타인의 시선을 다시 내 삶의 중심에 앉혀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책상 속에 숨어 있던 적은 외부의 시련이 아니었다.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조바심.

‘잊히지 않아야 한다’는 오만.

그것이 내가 성 안으로 들인 진짜 목마였다.

나는 내 손으로 목마를 들였고, 내 삶의 고요를 조금씩 그 목마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승전가를 부르던 트로이 사람들처럼, 나 역시 자유를 모두 얻었다는 착각 속에서 내면의 빗장이 풀려가는 줄도 몰랐다.

새벽이면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창틀에 기대어 서 있으면 내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숫자는 네가 아니다.”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가 새벽 공기보다 더 차갑게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조바심은 그 목소리를 노년의 예민함이라며 밀어냈다.

라오콘이 목마를 향해 창을 던졌듯, 내 안에서도 경고는 거듭 울렸다.

그럼에도 나는 달콤한 안도감의 술잔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책상의 나뭇결을 다시 천천히 짚어본다.

깊은 숲에 서 있을 때 나무는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제 몸에 나이테를 그어갔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무너뜨린 것은 퇴직의 쓸쓸함이 아니었다.

쓸쓸하지 않은 척 거대한 전리품을 성 안에 들여놓고, 스스로를 우상화하려 했던 내 안의 탐욕이었다.

거실 창을 크게 연다.

새벽 산 공기가 목마를 천천히 식힌다.

마당에 홀로 선 목마가 다시 숲의 침묵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나뭇결에 가만히 이마를 기댄다.

그제야 깨닫는다.

나무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나이테를 새기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아마 퇴직 이후의 삶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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