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방향 없는 바람이 아니라,
기억이 부는 바람이다.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그 바람엔
한 사람의 체온이 묻어 있다.
그녀다.
이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
잊으려 해도,
잊지 않기로 해도,
어느 쪽이든 의미 없는 이름.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대신, 말 없는 고요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 고요는
어쩌면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겨우 붙들고 살던 날들,
그녀는 내 속의 빈틈을 바라보다
그 위에 조용히 손을 얹어주었다.
마치 ‘괜찮다’는 말을
손바닥으로 들려주는 사람처럼.
나는 그 순간들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창가에 앉아
흰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던 모습.
가로등 불빛 아래
눈을 감고 선 뒷모습.
아무 말 없이 걷던 골목에서,
그녀는 항상 내 옆에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온기를 충분히 붙잡지 못했다.
그리움은
불시에 찾아오는 법이다.
향기처럼,
그림자처럼.
다 잊었다고 믿었던 순간에도
스친 냄새 하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곡에
다시 살아난다.
그리움은
시간이 지운다고 희미해지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감정이다.
한때는 피하려 했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밀려오는 허전함.
그 따뜻함 뒤에 남겨진 냉기.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리움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슬픔처럼 휘몰아치는 게 아니라,
조용히 마음을 데워주는 감정이라는 걸.
그래서 이젠
창을 연다.
찬 바람이 들어오더라도
괜찮다.
그 바람 끝에서
그녀의 기억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 기억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는 떠났지만,
남겨진 감정은
여전히 나와 함께 살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보다 오래 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 계절,
나는 마음속 창을
조심스레 열어둔다.
그리움은
언제나
따뜻한 방향에서 불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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