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내게 오랫동안 친구이자 위안이었다. 나는 한동안 참 많은 책을 읽었다. 처음부터 독서에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책을 통해 성공을 꿈꾸지만, 나는 단지 책이 재미있었다. 책 속에 나를 숨기고 싶었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용한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만화책에서 시작해 무협지, 고전 문학, 현대 소설, 철학서, 자기계발서까지 가리지 않았다. 하루에 두세 권씩 읽는 날도 있었고, 밤을 새워 12권짜리 무협지를 다 읽은 적도 있다. 활자의 흐름을 따라가며 어느새 이야기 속에 잠겨 있는 나 자신을 자주 발견했다.
특히 시집을 좋아했다. 짧고 압축된 문장 속에 담긴 깊은 감정이 좋았다. 시인은 한 줄의 문장으로 내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풀어내주었고, 나는 그 안에서 나를 위로받았다.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면 시 한 편을 읽으며 중심을 잡으려 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글을 쓰게 되었고, 결국 시집도 출간하게 되었다. 특별한 계획도, 전략도 없었지만, 감정이 가는 대로 써내려간 글들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에 조심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많은 것을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사람과의 관계도 늘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받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쓴다. 거절을 잘하지 못해 내 마음을 뒤로 미룰 때도 많았다. 대신 나를 다치게 하는 사람은 조용히 내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은 늘 나를 지치게 했고, 그래서 가능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렇다고 사람을 외면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늘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려 했다. 누군가와 나눌 때면 손해를 보더라도 더 많이 주는 쪽이 되기를 원했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기대한 것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세상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한때는 시력이 매우 좋았다. 작은 글씨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었고, 책은 항상 손 닿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노안이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활자가 흐릿해지자 독서가 점점 멀어졌고, 글쓰기도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그런 시간이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교직에서 은퇴하고, 삶의 리듬이 느려지면서 다시 책을 펴고 펜을 들기 시작했다. 시가 아닌 수필을 쓰기 시작한 건 내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필은 삶을 돌아보고, 내면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놓는 글이다.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적어 내려가는 글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돌아보면 그 오랜 시간 읽어온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책은 나를 다듬었고, 감정을 키웠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길러주었다. 독서는 단지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연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연습의 결실을 수필로 피워내고 있다.
노년의 삶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더 단단하고 깊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결국, 오랜 독서의 시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혹시 지금 삶이 버겁고, 마음 둘 곳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책을 한 권 펼쳐보기를 권한다. 그 속에는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자신이 살고 있다. 활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서 낯설지 않은 어떤 감정이 손을 내밀 것이다. 그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잊고 있던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리고 나의 삶 역시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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