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은 말수가 적어진다. 바람은 소리를 낮추고, 숲은 숨을 고른다. 그렇게 모든 것이 천천히 가라앉는 계절에 사람은 비로소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날의 파주도 그랬다. 한파가 몰아치던 주말, 우리는 오래 미뤄두었던 약속을 꺼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지나온 친구들, 이제는 각자의 삶을 짊어진 채 다시 만난 부부 동반의 자리였다.
파주 겨울여행의 목적지는 친구가 정했다. 며칠 전 혼자 다녀왔다며,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가보면 안다”고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호수 인근의 한 숲속으로 향했다. 도로는 어느 순간 포장을 멈췄고, 차는 비포장 길 위에서 조심스럽게 속도를 낮췄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말도 줄어들었다. 마치 이 길이 우리를 다른 시간으로 데려가는 것처럼.
숲길 끝에서 만난 소령원숲속은 처음엔 수수했다. 기와를 얹은 한옥은 세련되기보다는 오래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인상은 조용히 뒤집혔다. 방들은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문마다 적힌 숫자는 어린 시절 교실의 기억을 불러냈다. 우리가 들어선 방에는 여덟 자리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다.
그 유리창 너머로 숲이 들어왔다. 특별히 빼어난 풍경은 아니었다. 겨울 나무들은 잎을 모두 내려놓은 채 서 있었고, 눈은 소리 없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액자처럼 잘린 숲의 풍경이, 이상하게도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었다.
주문한 음식은 능이오리백숙과 오리주물럭, 그리고 오리 생고기였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삶은 다르게 흘러왔지만, 웃음이 터지는 지점은 여전히 같았다. 국물이 끓기 시작하자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퍼졌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몸보다 마음이 먼저 풀어졌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 오래 우려낸 깊이. 겨울에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말이 그제야 이해됐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충분히 따뜻했다. 좋은 풍경과 조용한 공간, 그리고 오랜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생기는 편안함이 있었다. 이곳이 파주 겨울가볼만한곳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아마 그런 공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보다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정적과 여백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마장호수로 이동했다. 호수는 겨울답게 고요했고, 데크를 따라 걷는 발걸음 소리마저 낮았다. 이어 들른 오랑주리 카페는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실내 가득한 식물들 사이로 빛이 내려앉고, 유리창 너머로 호수가 보였다. 커피를 마시며 창가에 앉아 있으니, 하루가 천천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날의 파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 않았다. 대신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온기, 그리고 오래 남을 장면 하나를 건넸다. 겨울 숲과 한옥, 따뜻한 오리 요리,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들. 그 조합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소령원숲속은 특별한 목적지가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쉼표 같은 장소였다. 파주 겨울여행을 계획하는 이라면, 화려함 대신 고요함을 찾는 이라면, 이 숲속의 시간을 한 번쯤 건너가 보아도 좋겠다. 겨울은 그렇게, 조용히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계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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