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속에 남은 기억 한 조각, 삼십 년을 견딘 따뜻한 쪽지의 이야기

벌써 삼십 년이 지났다.
가끔 서랍을 정리하다 보면 손에 잡히는 낡은 갈색 지갑 하나.
겉은 갈라지고 모서리는 닳았지만, 그 지갑만큼 오래 나와 함께한 것도 드물다.
이따금 손에 쥐고 천천히 열어보면, 꼭 오래된 편지처럼 묘한 온기가 스민다.

그 시절 나는 스물일곱이었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고,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혼잣말로 “괜찮아”를 되뇌어도, 하루가 저문다는 감각조차 무뎌지던 시간.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조심스럽게 내민 작은 상자 하나가 내 앞에 놓였다.

“오빠, 생일이니까… 이거 받아.”

포장을 벗기니 낯선 상표가 찍힌 지갑이 나왔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디자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손에 쥐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지갑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빳빳한 만 원짜리 한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쪽지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오빠, 지갑 가득히 돈을 버세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동생의 다정한 믿음과 말 없는 응원을 읽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쪽지를 조심스레 다시 접어 지갑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다짐을, 마음속에 천천히 눌러 담았다.

이후로 내 삶은 천천히 방향을 잡았다.
첫 월급을 받던 날, 나는 그 지갑 안에 오만 원짜리 지폐를 겹겹이 채워 넣었다.
지갑이 두툼해질수록, 마음속 그 쪽지는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종이는 닳았을지 몰라도, 문장은 내 안에서 흐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나는 두타산 아래 작은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계산을 하려 지갑을 꺼내려던 찰나, 뒷주머니가 텅 비어 있는 걸 느꼈다.
지갑이 없었다.
떨어뜨린 건지, 누군가 가져간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안에 있던 돈이나 카드 때문이 아니었다.
쪽지.
그 쪽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마음을 더 허전하게 했다.

며칠 뒤, 동네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누군가 주운 지갑이 접수되었고, 주민등록증 덕분에 연락할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달려가 확인한 지갑은 내 것이 맞았다.
하지만 지갑 속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도, 카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쪽지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안엔 단 하나, 주민등록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지갑보다 마음 한 자락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지갑을 버리지 못했다.
지갑은 비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마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쪽지는 종이였지만, 그 문장은 내 안으로 옮겨와 살아남았다.

삼십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지갑을 꺼내 본다.
쓸 일도 없고, 들고 다니지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늘 곁에 두게 된다.
지갑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어떤 시절을 꾹 눌러 담은 시간의 조각이다.

나는 안다.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어떻게 붙잡아 주는지를.
그 문장은 더 이상 종이에 쓰여 있지 않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월이 어디로 흐르든,
그 지갑과 그 문장은 나에게 여전히 같은 말을 건넨다.
지갑은 비었지만, 나는 아직 지갑을 쥘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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