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는 삶의 미학: 조용한 걸음이 주는 위로와 치유

한참을 걷다 문득 멈춘 적이 있다.
걷는 것 자체가 버거운 날이었다. 가슴이 조이듯 답답하고, 발끝에 납덩이처럼 무거운 것이 매달린 느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서둘러 살아왔을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재촉한 적이 없는데, 나는 왜 늘 달려야 한다고 믿었을까.

그날은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바삐 지나갔고, 나는 그저 처마 밑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빗방울이 바닥에 닿으며 조용히 터졌다.
하나하나가 터지는 순간은 짧았지만, 그 작은 소리들이 모여 묵직한 침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울리는 다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삶은 종종 큰 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의 미소, 손끝의 떨림, 계절이 바뀌는 냄새, 아직 남아 있는 찻잔의 온기.

이 모든 것은 바쁘게 달릴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멈추었을 때, 조용히 걸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예전의 나는 늘 앞사람의 등을 좇았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그래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인생은 결승선을 향한 경주가 아니라, 자신만의 풍경을 하나씩 발견해 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내 마음에 가까운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한 번은 이런 순간도 있었다.
지하철 안, 힘겹게 앉아 있던 어르신이 조심스레 마스크를 내리고 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은 숨이 좀 쉬어진다.”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군가의 ‘오늘’이 얼마나 벅찰 수 있는지를,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일인지 다시 보게 되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성취가 아니라, 더 깊은 호흡이다.
조용한 걸음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삶.
그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나는 이제, 느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서 있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다독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삶은 결국, 나를 따라 걷는 것이지 남을 따라 뛰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이제 걸음을 늦춘다.
하루에 한 번,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 이 길은 너를 위한 길이니?”

그 질문 앞에 선 나는 조금 더 정직해진다.

그리고 오늘도 내 걸음에 맞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걷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닿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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