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열자, 미국에서 온 막내 여동생이 웃었다.
그 웃음은 공기를 바꾸었다.
잠시 후, 누나까지 도착했다.
세월이 흩뜨려 놓은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다.
우리는 오래 참았던 대화를 꺼냈다.
주제를 정할 필요도 없었다.
잊었던 기억들이 저절로 문을 열었다.
어린 날, 나는 동생들을 업고 다녔다.
좁은 어깨였지만, 그 위에 실린 건 무게가 아니라 관계였다.
책임, 애정, 그리고 말 없는 약속.
웅변을 가르치던 장면도 떠올랐다.
낡은 거실이 무대였고, 나는 지도자였다.
막내의 목소리는 처음엔 떨렸지만, 곧 세상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날, 나는 알았다.
동생이 빛날 때, 나도 빛난다는 것을.
누나의 기억도 빠질 수 없었다.
농협에 다니며 어렵게 들여온 한국문학전집 오십 권.
나는 그것을 한 권도 남김없이 삼켰다.
그 책들이 내 속에 뿌리내려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사소한 장면도 선명하다.
친구들이 집에 왔을 때, 누나가 건네던 작은 용돈.
그 지폐에는 돈보다 깊은 온기가 있었다.
그 따뜻한 손길이야말로 형제의 증거였다.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고마움들을 꺼냈다.
눈빛 속에서, 잊힌 줄 알았던 순간들이 다시 살아났다.
삶은 단단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는 한 버틸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시간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였다.
어릴 적 이불 속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멀리 살아온 세월도, 그 순간만큼은 무력했다.
그때 생각이 스쳤다.
인생은 결국 ‘기억의 빚’을 갚는 여정이 아닐까.
우리가 추억을 꺼내는 일은, 서로에게 남겨둔 감사의 흔적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밤이 깊자, 대화는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 고요는 끝이 아니라 여운이었다.
오늘의 목소리와 눈빛은 또 다른 날 우리를 불러낼 것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형제들과 나란히 앉아 웃던 그 순간.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묻고 있다.
―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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