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단풍처럼 조용히 물든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 아니라,
마음이 말을 배우는 계절이다.

푸른 잎이 붉어진다는 건
한 존재가 더는 침묵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 사실을 그해 처음 알았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까지
단풍이 왜 물드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은
늘 나보다 반 박자 빠르게 계절을 살았다.

나는 여름에 머물렀고
그 사람은 이미 가을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햇살 속의 웃음도 좋았지만
혼잣말처럼 내뱉던 말이
더 오래 가슴에 남았다.

“단풍은 나무가 안쪽에서부터
불타기 시작하는 거래요.”

괜히 마음이 쓰였다.
겉은 아직 푸른데
속은 이미 불붙고 있다니.
그 말이
그 사람 자신을 말하는 건 아닐까.

나는 그때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표현하지 못했을 뿐
내 안에서는 사계절이 동시에 일어났다.

봄의 떨림
여름의 확신
가을의 물듦
겨울의 망설임

내 감정은
언어가 되기 직전의 색으로
조용히 나를 물들이고 있었다.

고백은
한 번뿐이었다.

짧았고
조용했고
예측 가능한 대답이 돌아왔다.

“고맙지만…”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겨울이었고
나는 아직 물드는 중이었다.

단풍은
나무가 아프다고 말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랑도
그렇게 물든다.
조용히
안쪽부터

찬란함은 항상
소멸을 전제로 한 빛이다.

그 가을 이후
나는 감정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말은 가볍고
침묵은 무겁다.
그 사이 어딘가에
내 마음이 있다.

지금도
잎을 떨군 나무를 보면 위로받는다.

가장 벗겨진 모습으로
가장 본질적인 것을 지키고 있는 나무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요”라고 말하겠지만

그 질문이
가을에 던져진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적이 있었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방식으로”

단풍은 매년 다시 피지만
같은 색으로 물드는 법은 없다

사랑도 그렇다
그때 그 사람을 사랑한 방식으로
나는
다시는 누구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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