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오래된 기억은 영상이 아니다.
목소리도 아니다.
흰 봉투에 접힌 연두색 편지지.
‘잘 지내지?’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내 유년의 한복판을 붙잡고 있다.
영상은 없다.
그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흐릿하다.
그런데 그 글자는 또렷하다.
그날의 공기, 내 기분, 눈가에 살짝 번진 잉크까지.
기억은 시각보다 의미에 저장된다.
영상은 장면을 기억시키지만,
문자는 나를 기억하게 만든다.
몇 해 전, 아내가 떠났다.
기나긴 투병 끝이었다.
병실의 창밖에 눈이 쌓이던 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모든 장례가 끝난 밤.
나는 혼자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영상을 켰다.
함께 여행했던 어느 봄날.
강가를 걷던 그녀의 뒷모습.
나는 울지 않았다.
그 순간은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 같았다.
이틀 뒤, 정리하던 책상 서랍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익숙한 글씨.
노란 메모지에 적힌 짧은 문장.
“나 없이도, 네가 웃을 수 있기를.”
거기서 울었다.
말이 아니라 글이었다.
그 짧은 문장이 그녀의 부재보다 더 확실하게,
그녀의 존재를 내 안에 다시 데려왔다.
영상은 빠르게 지나간다.
문자는 오래 머문다.
영상은 보여주는 것을 택하고,
문자는 남기는 것을 택한다.
영상은 언제든 꺼낼 수 있지만,
꺼낼수록 옅어진다.
문자는 꺼낼수록 깊어진다.
시간을 거슬러 되새기며 읽게 되니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문장을 다르게 읽는다.
문자와 영상은 기억을 저장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방향이 다르다.
영상은 ‘그때 거기’를 붙잡고,
문자는 ‘지금 여기’를 묻는다.
당신은 그 장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고.
영상은 누군가의 눈으로 남긴 기록이고,
문자는 나만의 해석으로 완성된 기억이다.
영상은 명확하지만, 감정은 흐릿하다.
문자는 불완전하지만, 감정은 또렷하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것을,
문자는 알고 있다.
언젠가, 지금 이 순간도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이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고,
또 누군가는 문장으로 남길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남기고 싶은가?
🏁 끝맺지 않는 결말
화면은 꺼지면 끝나지만,
문장은 읽는 이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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