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바가지’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시장에서 값을 속이거나, 누군가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 쓰이는 말이 되어버린 바가지는, 과연 원래부터 부정적인 존재였을까.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가면, 부엌 한켠에 걸려 있던 낡은 바가지가 문득 떠오른다. 누렇게 바랜 나무 벽, 못 하나에 덜렁 매달려 있던 그 그릇은 마치 한 가족의 일상을 지켜보는 작은 목격자 같았다. 투박하고 금이 가 있었지만, 그 속엔 외할머니의 손길과 계절의 냄새가 고여 있었다.
그 바가지는 단순한 물푸는 도구가 아니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물건이었다. 아침이면 장독대 옆에서 물을 퍼 왔고, 낮에는 밭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의 손을 씻겼으며, 저녁이면 손주들의 입에 시원한 물을 떠주었다. 손에 쥐기 딱 좋은 곡선과 손등을 적시는 물의 감촉은, 전자레인지나 정수기 버튼이 줄 수 없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당시의 바가지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일상의 의식’이었다.
시골 마당 끝 울타리에 심은 박넝쿨은 계절을 따라 지붕을 타고 자랐고, 가을이면 둥근 박들이 보름달처럼 매달렸다. 그 속은 먹고 껍질은 말려 바가지를 만들었다. 바가지는 그저 용기를 넘어서, 자연과 사람이 만든 합작품이었다. 찬밥과 남은 나물을 바가지에 넣고 고추장 한 수저, 참기름 몇 방울을 넣어 쓱쓱 비벼 먹던 저녁은 단출했지만 특별했다. 화려하지 않아도 진심을 담을 수 있다는 걸, 그때의 식사는 말없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바가지는 고운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똥바가지도 있었고, 빨래 헹굼물도 담았으며, 누군가 아플 때는 약탕물도 담았다. 쓰임은 달라도 기능은 분명했고, 모든 상황에서 제 몫을 해내는 그릇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순간이 바가지에 새겨진 기억이다. 요즘의 일회용품이나 플라스틱 그릇은 사용과 동시에 버려지지만, 바가지는 손때가 배고, 금이 가도 고쳐 쓰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것은 어떤 물건이 우리와 얼마나 깊이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바가지는 손에서 멀어졌다. 도시로 올라와 바쁘게 살아가면서, 바가지는 사라지고, 그 이름만이 부정적인 말로 남았다. ‘바가지를 쓰다’는 손해를 보는 일이 되었고, ‘바가지를 긁는다’는 잔소리로, 피곤함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원래는 공동체 안에서 정을 나누던 도구였던 바가지는, 이제는 오해와 불만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단지 물건 하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겼던 마음의 여백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외갓집의 그 바가지를 떠올린다. 여름날, 흙 묻은 발로 마루에 올라앉으면 외할머니는 말없이 바가지에 물을 담아 건넸다. 그 물 한 바가지엔 말 없는 정성과 더불어, 살아 있는 관계가 있었다. 소통이 점점 말과 텍스트에만 의존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가. 말보다 느린 온기, 쓰임보다 오래 가는 관계가 이제는 더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 바가지를 너무 빨리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가 무례함으로 바뀌고, 애정의 표현이 불평으로 읽히는 세상 속에서, 투박하지만 단단했던 바가지는 다시 돌아올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물이 담기던 둥근 그릇 하나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소통이고 정서이며,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잔상이다.
그 바가지에는 물만 담긴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사람 사이의 온기, 함께 살아가는 노동의 의미,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지금 우리의 손이 빈 듯 느껴진다면, 어쩌면 그때의 바가지가 그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바가지를 다시 삶 속에 불러내는 일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부터 멀어졌는지를 돌아보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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