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 — 물고기였던 시간

나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말이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오랜 체념에서 비롯된다. 깊은 물 안에서는 소리도, 빛도 멀다. 물살은 늘 조용히 몸을 감싸지만,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 나를 밀쳤다.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 일이 아니라, 그 순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지가 찢어지고 무릎에서 피가 났지만, 나는 그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괜찮아.”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더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 조용함은 자라면서 점점 더 단단한 껍질이 되었다. 중학교 땐 복도에서 친구들끼리 나를 두고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모른 척했고, 고등학교 땐 발표 시간마다 늘 일부러 한 박자 늦게 손을 들었다. 스스로를 가리기 위해 웃었고, 사람들 앞에 나설 땐 마음속의 문장을 검열했다. 내가 말한 단어들이 어디로 흘러가서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두려웠다. 나는 내 목소리를 믿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나는 물고기였다. 강물 깊은 곳, 사람의 언어가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부유하는 존재. 말없이 바라보고, 말없이 삼키고, 말없이 잊어가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내 안의 물은 매일 조금씩 썩어갔다. 고인 감정은 언제나 가장 늦게 썩는다.

대학교 2학년, 처음으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모두가 제 목소리를 자신 있게 낼 줄 알았고, 나는 여전히 속으로만 대사를 읊조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조연이었던 내가 단역으로 무대에 올랐고, 대사를 외우던 중 실수로 말이 엉켜버렸다. 그 순간, 객석에서 누군가 웃었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틀려도 무대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내가 말을 잃어도, 세상은 나를 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물 위로 올라왔다. 처음엔 서툴렀고, 여전히 말끝이 흔들렸지만, 목소리 속에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숨지 않았다. 말하는 것, 울먹이는 것,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나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말은 방패가 아니라 다리였다.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도구.

이제는 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물속을 통과해 나온다는 걸. 어떤 이는 짧고 얕은 강을 건너고, 어떤 이는 깊고 어두운 해류를 지난다. 나는 내 물속을 지나며 상처를 품었고, 그 상처는 나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말 없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말이 더 조심스럽고 따뜻하다.

요즘 나는 자주 물고기 그림을 그린다. 무의식처럼 스케치북에 휘갈긴 그 그림에는 눈동자 대신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한때 나도 그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흐릿하고, 멀고, 무음으로만 존재하던 세상.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말할 수 있고, 내 목소리는 더 이상 물에 잠기지 않는다. 그 구멍은 아직 남아 있지만, 이제는 바람이 드나드는 창문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내게 말한다. “넌 참 말이 조곤조곤해.” 그 말은 한때의 상처가 지금은 결이 되었다는 증거다. 나는 더 이상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물고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물고기였던 시간을 품은 사람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 어딘가엔 여전히 물이 고여 있다. 그러나 그 물은 이제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기억의 연못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반짝이는 거울. 나는 그 물을 안고 살아간다. 가끔은 울컥하고, 가끔은 침잠하지만, 물 아래로 다시 잠기지는 않는다.

말 없이 울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나의 일부로, 나의 소리로 남아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조용했던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내 속에서 물이 말이 되기를, 말이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사람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그런 꿈을 품고, 나는 한 마리 물고기로부터 여기까지 헤엄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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