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키 작은 아이가 맨 끝에 줄을 섰다.
그 아이는 조용히 발끝만 내려다봤다.
줄은 키순이었지만,
아이의 마음엔 ‘존재 순’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세상엔 순서가 있다고 믿게 된 건.
사람들은 말한다.
“질서를 위해 서열이 필요해.”
하지만 나는 가끔 의심한다.
그 질서가 모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위에 세우기 위한 장치인지.
가정에선 가장의 말이 법이고,
회사에선 직급이 사람의 온도를 결정한다.
회의실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의 말이 기록된다.
웃음도, 눈빛도, 심지어 침묵까지도
서열의 방향을 따른다.
나는 서열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그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했다.
누군가 나보다 뒤에 설 때
은근한 우월감을 느꼈고,
누군가의 칭찬에 마음이 흔들렸다.
내 안의 작은 ‘서열 본능’.
그건 부끄럽지만, 지울 수 없는 그림자였다.
산으로 들어간 자연인들.
세상의 줄서기를 거부한 사람들.
하지만 그들도 말한다.
“이 산에선 내가 1등이지.”
서열에서 도망쳐도
인간은 결국, 다시 서열을 만든다.
그건 본능일까,
아니면 불안의 다른 얼굴일까.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서열이 인간성을 먹어치울 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수백만 명의 젊은 생명이
전쟁의 서열 속에서 스러지고 있다.
국가의 체면,
지휘관의 명예,
수장의 판단—
그 위계 속에서 목숨이 사라진다.
서열은 그렇게,
존엄을 폭력으로 바꾼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진짜 ‘높은 사람’은
서열 위에 선 이가 아니라,
서열에서 벗어난 이라고.
지위를 등에 지지 않고도
무게를 가진 사람.
말을 높이지 않아도
경청받는 사람.
그런 이는
타인의 고개를 숙이게 하지 않고, 마음을 들게 한다.
어느 날, 오래된 찻집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평생 청소부로 일했다고 했다.
“나는 남의 뒷자리를 닦는 게 내 일이었어.
근데 그게 참,
누군가에겐 필요한 일이더라.”
그 말은 잔잔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진짜 ‘큰 사람’을 만났다고 느꼈다.
사계절이 흐르고,
서열도 바뀐다.
봄엔 키가,
여름엔 돈이,
가을엔 지위가,
겨울엔 지혜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진짜 순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정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인 이의 눈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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