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열한 시쯤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먹을 것은 충분했다.
남은 반찬도 있었고, 과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더 분명했다.
먹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먹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요즘은 못 먹어서 문제가 되는 사회가 아니다.
너무 먹어서 병이 생긴다.
절대적 빈곤이라는 말은 점점 낡아간다.
최소한의 삶은 대부분 보장되고,
굶주림은 예외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
부족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하면서도
늘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느낀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다.
물건도, 정보도, 선택지도 넘쳐난다.
휴대전화 화면을 넘기다 보면
필요 없는 물건이 필요해 보이고,
사야 할 이유가 없어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하라고 말한다.
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뒤처질 것 같고,
뒤처지면 쓸모없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산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안심하기 위해서다.
잠깐은 배부르다.
그러나 그 배부름은 오래가지 않는다.
허기는 늘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요즘은 이런 미래까지 이야기된다.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무한에 가까운 생산이 가능해지면
상품의 가치는 낮아지고,
화폐의 의미도 흐려질 거라고.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국가가 기본적인 삶을 책임지는 세상.
누구도 굶지 않고,
누구도 버려지지 않는 미래.
듣기에는 이상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다
문득 숨이 막혔다.
그 사회에서
나는 무엇으로 하루를 견딜까.
아침에 일어날 이유는 무엇일까.
해야 할 일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할까.
지금도 이미 우리는 비슷한 문 앞에 서 있다.
기술은 빠르게 앞서가고,
삶은 점점 편해진다.
그런데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과잉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결정은 어려워졌고,
풍요로울수록 만족은 짧아졌다.
부족해서 괴롭던 시대에서
이제는 충분해서 불안한 시대로 옮겨온 셈이다.
어쩌면 인간은
결핍 속에서 방향을 찾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모자라야 바라게 되고,
바라야 살아간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게 될까.
그때의 빈곤은
돈도, 물건도 아닐 것이다.
먹을 것은 넘쳐나는데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가난.
나는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날 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이 허기가 무엇인지
조금 더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과잉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그 충분함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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