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이 내게 남긴 것, 상상이 삶을 버티게 하던 시절

내가 무협지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작은삼촌이 쓰던 방, 낮에도 전등을 켜야 할 만큼 어두운 그 방 한쪽 책장에 낡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와룡생의 「비연」, 다섯 권짜리 무협지였다.
표지는 손때로 번들거렸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 냄새와 먼지가 함께 올라왔다.

그 시절 나는 촌에 살았다.
서점도, 도서관도 몰랐다.
책은 사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는 것이었고,
만난 책은 다시 돌려줘야 했기에 더 귀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섯 권을 반복해서 읽었다.
밤에 읽고, 낮에 읽고, 다시 첫 권으로 돌아가 읽었다.
다음 장의 문장을 외우면서도 책장을 넘겼다.

무협의 세계는 단순했다.
선과 악은 분명했고, 의협은 늘 옳았다.
사랑 앞에서는 계산이 없었고, 약자를 돕는 데 이유를 묻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책 속에서는 마음껏 편을 들 수 있었다.
그 단순함이 어린 나를 안심시켰다.

경공술과 기의 세계는 더욱 그랬다.
사람이 지붕 위를 날고,
수련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들을 읽을 때면
나는 책 위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숨을 죽였다.
그 세계는 너무 멀어서 거짓말 같았고,
그래서 더 믿고 싶었다.

그 세계는 생각보다 오래 나를 붙잡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무협지를 읽었다.
밤을 새워 열두 권짜리를 독파하고 나면
새벽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오곤 했다.
철학서도 읽었고 문학책도 읽었지만,
무협은 언제나 가장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자리였다.

무협은 영화로 이어졌다.
취권, 소오강호, 동방불패, 와호장룡.
극장에서 나와 밤거리를 걸으며
혹시 이 도시 어딘가에 강호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상상을 진지하게 했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
이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어릴 적 TV에서는 레슬링이 인기였다.
김일의 박치기는 거의 신화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레슬링 이야기는 사라졌다.
사람들이 그것이 쇼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였다.
무협도 다르지 않았다.
자칭 쿵푸 고수들이 격투기 선수들에게 맥없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며
무협은 상상 속의 세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실망은 크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이미 성인이었고,
상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상상이 현실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현실이 상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무협은 내 삶을 바꿔주지는 않았지만,
내 삶을 견디게 해주었다는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
무협은 내게 넉넉한 세계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세계 덕분에 나는 덜 메말랐고,
현실을 조금 덜 초라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사람이 하늘을 난다고 믿지 않는다.
기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리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라는 것은 믿는다.

현실이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그 틈을 견디게 하는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읽었던
낡은 무협지 다섯 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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