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문학, 작가라는 이름은 여전히 유효한가?

겨울이면 문학의 문은 어김없이 닫히고, 또 어김없이 열린다.
신춘문예 공고가 뜨는 그 순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떨림을 다시 느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이상하게도 글 쓰는 이들의 심장은 조금 더 뜨거워진다.
누군가는 원고를 끌어안은 채 밤을 지새우고, 누군가는 자신의 문장을 믿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새해의 문턱을 넘는다.
그 문 앞에서, 나는 늘 작아진다.

한국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등단.’
한 단어에 수많은 내면의 상처, 기쁨, 인내가 응축된다.
나는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산문이 아니라 산(山)을 상대하는 것처럼 느꼈다.
고독해야 하고, 버텨야 하고, 무엇보다 글 속에서 스스로를 발굴해야만 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타인이 부여하는 칭호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결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판결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AI가 문장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해 신춘문예 응모 요강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응모작에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당선이 취소됩니다.”
한 문장이지만, 나는 그 문장 안에서 문학의 오래된 질서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장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문장을 ‘만드는’ 방식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나는 손으로 문장을 고쳤다.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고, 단어 하나에 며칠씩 머무르기도 했다.
문장이라는 것은 결국 감정의 온도가 있어야 하고, 마음의 흔들림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AI는 흔들리지 않는다.
고통도, 희망도, 절망도 겪지 않은 손끝에서 너무도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매끄러움이 오히려 내 문장의 거친 숨결을 초조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나는 한동안 그 ‘매끄러움’과 싸웠다.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나는 왜 이리 오래 아파야 하는가.
누구나 문장을 만들 수 있다면, 작가라는 이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 홀로 놓인 듯했다.

하지만 어느 날, 오랫동안 고쳐 쓰던 문장의 끝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싸워온 것은 AI가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나보다 더 잘 쓰는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
내 문장이 누군가에게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고독.
글쓰기를 통해 나를 증명하고 싶었던 욕망.
AI는 그 두려움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AI가 아무리 문장을 잘 만들어낸다 해도,
AI는 살아온 시간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문장은 내가 살아온 방식의 그림자다.
흔들린 날의 각도, 기뻤던 날의 밝기, 버티던 날의 무게가 그 안에 녹아 있다.
그것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내야만 얻을 수 있는 결(結)이다.

바둑에서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졌을 때, 많은 이들은 인간의 패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패배가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패배를 견디는 용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힘.
AI 시대의 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학은 더 이상 ‘누가 더 잘 쓰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자기 자신을 견뎌내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 문학의 문은 예전처럼 좁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은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열리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에 다가서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자신에게 무엇을 물었는가이다.

나는 여전히 묻는다.
나는 왜 쓰는가.
이 질문은 아마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고, 그 질문을 떠안고 살아가자는 결심이야말로 작가의 삶이 아닐까.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내 안의 상처가 문장으로 변하는 그 떨림만큼은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문 앞에 선다.
문을 열지 못하더라도, 문을 향해 걷는 이 시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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