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지 위에서 썰매를 탔다.
죽은 이들이 잠든 언덕,
우리는 깔깔 웃으며 미끄러졌다.
어른들은 찡그렸지만, 우리는 알았다.
죽음 위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걸.
아이였기에 가능한 경배였다.
삶이란, 죽음을 밟고 지나가는 속도였다는 걸.
도망가는 꿩을 본 적 있는가.
깃털이 흩날리고,
몸은 어딘가 기울어져 있다.
내가 그랬다.
어릴 적 나는 자주 도망쳤다.
놀림에서, 혼남에서, 어쩌면 나 자신에게서.
그러다 알게 됐다.
진짜 살아 있는 것은
늘 도망치고 있다는 걸.
숨는 건 나약함이 아니다.
숨는다는 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무너진 돌은 숨어 있지 않는다.
단단한 것만이
숨을 곳을 찾는다.
개울 이름은 ‘하전’이었다.
‘아래의 논’이란 뜻이었다.
모든 것이 위에서 흘러와
거기서 씻겼다.
나는 그 물에 발을 담갔다.
그러다 엉겅퀴에 찔렸다.
피가 났고, 울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흙탕물이 되는 순간이 어른이 되는 순간이라는 걸.
흙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깨끗한 물은 길을 가르지만,
흙은 방향을 묻지 않는다.
내가 어른이 되지 못한 이유는
아직도 방향을 고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끼장을 열었을 때,
그곳은 비어 있었다.
새끼 여덟 마리, 모두 사라졌고
바닥엔 피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는 말없이 칼을 씻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사람은 말을 듣고 자라는 게 아니라
침묵을 마주하고 자라는 거였다.
무엇이 사라졌는지,
왜 사라졌는지를 알게 되는 그 순간,
우리의 유년은 끝난다.
지금도 가끔 그 마을을 떠올린다.
구슬을 튕기고, 자치기를 하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숨던 그 마당.
숨었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 있었단 증거였다.
지금의 나는 어디에 숨고 있을까.
SNS 속인가, 타인의 기대 속인가,
혹은, 더는 숨을 수 없는 성인이라는 틀 안에?
묻는다.
나는 지금도 숨고 있는가.
아니면, 들켜도 괜찮은 내가 되었는가.
묻는다.
삶이란 정말,
썰매처럼 미끄러지는 것인가.
아니면
묘지처럼 조용히 버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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