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한 편지 – 세월 속에 남은 첫사랑의 이름

그대에게.

오늘은 오래된 편지지를 꺼냈습니다.
잉크병을 열자, 지난 세월의 냄새가 묻어 나옵니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창문 틈 사이로 낙엽이 한 장 날아듭니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대의 이름을 써봅니다.
그 이름은 여전히 내 손끝에서 떨립니다.

세상은 참 멀리 왔습니다.
편지를 쓰던 시절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손끝으로 서로의 얼굴을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에 잉크를 묻히며, 당신에게 말을 겁니다.
보내지 않을 편지임을 알면서도.

그대, 그때의 봄을 기억합니까.
산벚꽃이 피던 날, 당신은 흰 원피스를 입고 강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햇살에 물든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릴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엔 이런 빛깔의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그날 이후로 내 마음의 방향은 바뀌어버렸지요.
그대의 웃음이 내 하루의 날씨가 되었고, 그대의 침묵이 내 밤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 조심스러웠습니다.
말 한마디에 세상이 흔들릴까 두려웠고, 눈빛 한 번에 서로의 마음이 다 들킬까 숨어야 했지요.
그 시절의 사랑은 느리면서도 맑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옆모습 하나로 하루를 견디고, 당신의 인사 한마디로 밤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젊음은 불빛처럼 타오르고, 미련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대가 떠나던 날,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붙잡지 못한 것은 용기 부족이 아니라, 당신의 앞날을 흐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돌아서던 그 순간, 바람이 불었습니다.
당신의 머리칼이 휘날리며 내 쪽으로 흘러왔습니다.
그 향기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향기 속을 걸어갑니다.

지금 나는 늙었습니다.
머리칼엔 흰빛이 내려앉고, 손등엔 세월의 지도가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시간은 멈춰 있습니다.
그대가 떠난 그 봄, 내 마음은 거기서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왜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나요?”
나는 웃으며 대답합니다.
“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사랑이란 결국 기억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대는 내 삶의 어느 구간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그 자리만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이상하게도 그대만은 남겨두었습니다.
그건 아마, 내가 그리움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이따금, 내가 그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자체’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대는 나에게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통해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상실을 동시에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단지 당신에게 보내는 글이 아니라,
내 젊은 날의 나에게 쓰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대가 없는 세월 속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여러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 어떤 이름 속에도 당신이 남긴 그 한 줄의 떨림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웃던 그 순간의 공기, 목소리의 온도, 햇살의 기울기.
그 모든 것이 내 삶의 문장 사이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책상 위에는 식은 차 한 잔, 그리고 당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마치 대답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의 목소리와 닮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듣습니다.

이 편지는 내 마음의 기념비입니다.
당신이 아닌 세상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남은 당신의 흔적에게 바치는 인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보내지 못한 편지를 품고 산다고 하지요.
나는 그중에서도 오래된 사람입니다.
편지를 쓰고, 봉하지 않고,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는 사람.

그대여,
이 글이 닿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고요할 수 있는가’를 배웠습니다.
당신이 내 삶의 시작이었다면,
이 편지는 내 삶의 마침표일 것입니다.

오늘 밤, 나는 다시 펜을 놓습니다.
잉크가 다 마르기 전에, 바람이 먼저 닿습니다.
그 바람이 당신에게 닿는다면 좋겠습니다.
그대의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라도.

사랑이 아닌, 평화의 이름으로.
그대의 오랜 벗이자, 세월의 편집자였던
선비천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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