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계절: 지나간 시간을 곁에 두고 바라보는 순간들”

아침 햇살이 창가에 내려앉았다.
찻잔 속 찻물이 잔잔히 흔들리고, 그 안에서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아침.
하지만 이런 시간이야말로, 인생이 가장 진실해지는 순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시를 썼다.

감정은 늘 넘쳤고, 말은 부족했다.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출렁였고,
거절당하지 않은 사랑에도 아팠다.

그 시절의 나는 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매일 밤 노트 한 귀퉁이에 마음을 갈아 적었다.

“나는 왜 내가 아닌 것을 꿈꾸는가.”
“사랑은 언제나 나보다 늦는다.”

이런 문장들을 써내려가며 내 안의 뜨거움을 겨우 식혔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인생의 봄이었다.
무언가가 움트고, 무언가가 부서지던 계절.

서른이 지나자, 시는 말이 되지 못했다.
삶은 감정만으론 풀리지 않았고,
설명이 필요한 이야기들이 많아졌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삶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침묵과 선택, 후회를 통해 나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어느 여름날, 정류장 앞 빗속에 서 있던 노인을 보았다.
우산도 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그분.

몇 걸음 지나쳐 다시 돌아봤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소설 속에 그런 인물을 하나 넣었다.

끝내 다가가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
그건, 결국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수필을 쓴다.

더는 감정을 터뜨리지도,
이야기를 지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조용히 스쳐가는 하루를,
익숙해진 나를.
삶의 가장자리에서 피었다 지는 순간들을.

가끔은 어머니 생각이 난다.
이미 오래전에 떠나신 그분.

어릴 적, 어머니는 손수레를 끌고 장을 보러 가셨다.
나는 그 뒤를 따라다녔다.

비탈길에서 손수레가 미끄러질까 봐
손에 힘을 꽉 주시던 모습이 또렷하다.

그 길을, 요즘 나는 혼자 걷는다.
똑같은 길인데, 계절의 결은 달라져 있고
나는 이제 그때 어머니의 나이를 지나 있다.

어쩌면 수필은 그런 글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잠시라도 곁에 앉히는 글.

마음속에서만 살아 있는 사람을
조용히 불러보는 의식.

나는 어머니를 매년 이 계절에 다시 만난다.

냉이국 끓는 소리,
감나무 아래 그늘,
마른 손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던 손길.

그 모든 것들이 문장 사이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나는 지금, 수필의 계절에 머무르고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애쓸 필요도,
감정을 억지로 끌어낼 이유도 없는 나이.

그저 삶을 곁에 두고 바라보는 시기.
수필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문학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나요?

혹시 마음 한쪽에서 조용히 울리고 있는
기억 하나쯤 있지 않나요?

그 기억을 꺼내어
오늘 나와 함께 천천히 써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당신이 쓰는 그 문장이,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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