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작은 사과 괘짝으로 만든 토끼장이 있었다. 앞면은 철사로 엮여 있었고, 안에는 흰색과 회색 털이 섞인 토끼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나는 풀을 뜯어다 넣어주곤 했다. 씀바귀, 칡순, 콩잎, 당근. 토끼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사각사각, 오물오물. 그 작은 입이 풀잎을 씹는 소리는 마당의 평화를 대신했다.
토끼는 순하다고 믿었다. 초식동물이니 풀만 먹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세상에는 그렇게 ‘당연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장난처럼 멸치를 하나 넣어주었다. 그 작은 물고기를 토끼는 망설임 없이 물고, 오물거리며 씹었다. 놀랄 틈도 없이 나는 냉장고에서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꺼냈다. 말라붙은 기름이 선명한 한 조각을 조심스레 넣자, 그것마저도 토끼는 받아먹었다. 기름기를 물고, 익숙한 움직임으로 씹던 그 순간—내 머릿속의 ‘초식동물’이라는 개념은 조용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멸치도 모자라 돼지고기를 씹는 토끼라니. 하지만 그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던 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쉽게 ‘이런 동물은 이런 존재’라고 믿어왔는가 하는 사실이었다.
토끼는 고기를 먹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먹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토끼가 아니라 나였다.
그날 이후로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외모나 직업, 말투로 단정짓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비계’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분명히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그럴 리 없다고 여기는 모든 순간이—실은 나의 판단이 아니라 나의 한계였던 건 아닐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철사를 만든다. 이름표를 붙이고 구분짓고, 선을 긋는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단순해 보이고,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엔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편견은 스스로 만든 감옥이다. 토끼는 그 감옥을 모른 채 살아갔고, 나는 그 감옥을 만든 채 살아갔다.
그날 멸치와 돼지고기를 씹던 토끼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넌 정말 네가 아는 것만이 진짜라고 믿니?”
나는 아직도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그저, 언젠가 나도 누군가로부터 낯선 조각을 건네받을 날이 올까 생각해본다. 예상 밖의 상황, 예상 밖의 사람. 그때 나는, 예전의 토끼처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스스로 만든 철사로 나를 다시 가둘까?
편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입 안 가득 돼지고기 비계를 씹는 토끼처럼, 문득 우리의 상식을 비웃으며 다가온다.
그리고 진짜 자유는, 그 상식의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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