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이제, 정든 학교를 떠납니다

 

32년 전, 저는 작은 두 발로 이 교정에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법도 몰랐고,
언제 칠판을 닦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숨 쉬듯 교실로 향했고,
가르친다는 이름으로,
배우는 나날이었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습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
저는 이 교정에서 젊음을 묻고,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늙었습니다.

교실 한켠의 책상 위에는
지나간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교무실의 웃음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그 모든 날들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심신이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가르침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나의 자리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담담히 이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명예로운 퇴직이라는 이름으로,
32년간의 여정을 조용히 마무리하려 합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고집스럽고, 때로는 좁은 마음으로
선생님들께 불편을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에도 함께해주시고,
한결같이 동료로 손 내밀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아이들만 바라봤습니다.
그 아이들이 웃을 때,
제가 살아있음을 느꼈고
그 아이들이 성장할 때,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걸 믿었습니다.

이제 떠나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여기에 머무릅니다.
후배 선생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서로를 믿고 의지해주세요.
교실에 스며 있는 따뜻한 숨결은 여러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푸르던 나뭇잎은, 어느 날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그것이 이치이고, 또 자연의 법입니다.
저도 그 낙엽처럼, 담담히 내려앉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새순이 돋아날 것을 믿습니다.
더 푸르고 건강한 인항이라는 나무로 다시 피어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제,
조금은 자유롭게,
조금은 천천히,
그러나 여전히 교육을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부디 건강하시고
마음만은 늘 푸르시길 바랍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2023년 2월 7일
                                                           방철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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