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 비탈 위의 소나무

 

절벽 위, 바람이 스칠 때마다 외로움은 몸 안에 스며들었다. 이슬 머금은 바람이었지만, 그 안엔 살아온 날들의 거칠고 짠 흔적이 녹아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이 벼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조금씩 배워왔다.

활엽수들이 햇살을 나누며 자라날 때, 나는 그늘진 곳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남들은 지나치기 바쁜 황무지. 메마른 흙과 부서진 돌 틈, 겨우 숨 쉴 수 있는 그 공간에 내 삶은 조용히 자리 잡았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집안이 늘 살아온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피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늘 더 험한 길을 스스로 선택해왔다.

타인과의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
모진 바람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으려는 싸움.
눈보라 속에서도 뿌리를 놓지 않으려는 싸움.

겨울날 학교 화단 끝, 낡은 담벼락 곁에 홀로 서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자꾸 나를 떠올리게 했다.
아침마다 아이들은 바삐 지나쳤지만, 나는 그 나무 곁을 돌며 눈인사를 건넸다.
한 번은 가지 끝에 쌓인 눈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는데, 그날 따라 나도 가슴이 조금 무거웠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에게서,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나도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좋은 자리를 탐하기보단,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버텨내는 쪽을 선택하며.

그래서였을까.
누구도 오지 않는 이곳에서, 누군가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걸 나는 믿는다.
누군가는 그늘에서도 푸르러야 한다는 걸.

바늘처럼 찌르는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솔방울을 보고 말한다.
“하, 희한하다.”
그 짧은 말 안엔 놀라움도, 무심한 무관심도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의 말 한마디, 지나가는 손가락질 하나하나가
내게는 잊히지 않는 거름이 되었음을.

세상은 늘 나를 흔들었다. 천둥도, 번개도, 폭우도, 눈보라도.
때로는 나무꾼이 와서 날 베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들은 내 가슴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
무덤덤한 척 웃던 그 순간들조차
결국은 나를 키우는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하늘일까, 혹은 차가운 툰드라의 땅일까.

그래도 나는 오늘,
작고 푸른 마음 하나를 지켜보고 싶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누구의 정원에도 옮겨지지 않아도,
바람 부는 이 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하루하루를 견뎌낸 흔적이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그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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