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퇴근 후엔 늘 창문 앞에 앉는다.
불 꺼진 방,
어둠 속 유리창엔
내 얼굴과 바깥 풍경이 겹쳐 있다.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문 닫는 소리,
가로등 불빛.
아무 일도 없지만
그 조용한 풍경이
왠지 나를 안심시킨다.
어느 날,
구급차 소리에 창밖을 봤다.
붉은 불빛이 벽을 타고 지나가던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실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매일 밤 나를 이 자리에 앉힌다.
어릴 적,
아빠가 퇴근하던 길목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기억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예전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며칠 전,
지하철 창에 비친 내 눈이
이상하게 젖어 있었다.
운 것도 아닌데,
눈동자에 무거운 기운이 맺혀 있었다.
그날 하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강하다고 말한다.
차분하고,
무표정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덜 아픈 줄 알았다.
어릴 적,
창문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던 기억.
그게 떠올라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창에 입김을 불었다.
조심스럽게 그린
작은 동그라미 안이
잠깐, 따뜻했다.
봄의 초입,
벚꽃보다 먼저 핀 살구꽃을 봤다.
사람들은 스쳐 갔지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말을 걸 듯 흔들리던 그 꽃.
그날 이후로,
마음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창문이 있다.
닫아버린 사람,
반쯤 열어둔 사람,
오래된 창을 다시 바라보는 사람.
나는 아직
그 창을 완전히 열진 못했지만
아주 가끔,
바람을 들인다.
오늘 밤도
창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거기 비친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덜 단단하고,
덜 조용하고,
덜 괜찮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나다.
그리고 그걸 안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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