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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분쇄기 전략 속 병사의 얼굴: 전쟁과 인간 존엄에 대하여”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엔 이상하게도 햇살이 따스하다.”
어느 전쟁 사진작가의 말이었다.
죽음이 가장 가까운 그 자리에, 삶이 가장 또렷이 떠오른다는 역설.
그 말이 마음 깊이 박힌 건 오래된 신문 한 귀퉁이에서였다.

진흙탕에 쓰러진 한 병사의 사진이었다.
눈은 감겼고, 팔은 가슴 위로 겹쳐져 있었다.
마치 잠든 듯, 곧 일어날 것처럼 평온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되돌릴 수 없는 침묵이었다.

그날 이후로 ‘전쟁’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내 머릿속에는 늘 그 얼굴이 떠오른다.
전쟁은 단순한 국가 간의 충돌도, 지도 위의 작전도 아니다.
그것은 결국 한 사람의 생애가, 한순간에 꺼지는 일이다.

나는 군 복무 시절, 겨울 훈련장에서 총검술을 배운 적이 있다.
날카로운 바람 속, 모래 위에 박힌 모형 인형을 향해 반복적으로 찌르고 또 찔렀다.
구령은 크게 하였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실전도 아닌데, 내 손끝은 왜 이토록 진지했을까.
그 순간 문득, 내가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식판 위에 올려진 콩나물을 씹으며 생각했다.
“나는 정말 사람을 찌를 수 있을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사람들이 ‘고기 분쇄기 전략’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수백 명이 밀려 들어가고, 쓰러지고, 다시 들어간다.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는 곳으로 병사들은 계속 나아간다.

그들은 왜 그렇게 걸어들어가는 걸까.
조국을 위해서일까, 그냥 명령이니까?
아니면, 선택지가 없어서였을까.

전쟁터에서 존엄을 말하는 일은 때로 허망하다.
하지만 존엄을 잃는 순간, 인간도 함께 무너진다.
명령은 늘 후방에서 내려오고, 달리는 이는 침묵한 채 따라야 한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이 주어진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오후,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고 창밖을 바라볼 때
나는 그 병사를 떠올린다.
그가 쓰러진 자리는 어쩌면, 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단 한 번 멈칫했을 그 순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지도자는 말한다.
승리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전략이었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전략이란 말로 포장된 죽음이 얼마나 무겁고, 오래 가는지를.
죽음을 지시한 사람은 그 무게를 모른다.
죽음을 수행한 자만이, 그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가끔은 생각한다.
우리도 각자의 고기 분쇄기 속에서 살아가는 건 아닐까.
목소리를 잃은 채, 하루하루를 갈아넣으며.
더 나은 내일이라는 말 아래, 오늘을 소모하며.

우리는 누구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까.
그 명령은 정말 우리 삶을 위한 것일까.
스스로 묻고, 잠시 멈춰 서서 되돌아보는 일.
그것이 존엄을 지키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진흙 속에 누운 병사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물음은 오늘도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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