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텔레비젼 앞에서

 

밤이 깊었습니다.
집 안은 조용하지만, 거실 한가운데서
텔레비전이 쉼 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바람 없는 방 안에서 혼자 부는 바람 같았습니다.

아래 자막이 붉게 흐르고,
누군가는 울고 있었습니다.

익숙한 뉴스, 익숙한 눈물인데
오늘은 유난히 낯설었습니다.

리모컨을 들고 앉아 있었지만
채널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웃음이 터지는 예능도,
눈물이 흐르는 드라마도
모두 감정을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 나는
어디쯤 서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진짜를 고르기엔 세상이 너무 부드럽고
거짓을 밀어내기엔 내 손이 너무 무겁습니다.

어머니는 드라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주인공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아버지는 말 없이 리모컨을 건넵니다.
그 손끝엔 말보다 깊은 시간이 묻어 있습니다.

그 순간, 알았습니다.
이 집은 오늘도
조용한 연극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텔레비전은 전자기기가 아닙니다.
이 집의 벽난로이자
가장 큰 거울입니다.

우리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핑계이자,
말하지 못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무대입니다.

화면 속 가족이 웃으며
라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김이 피어오르고, 숟가락이 부딪히고…

그 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잠시 눈이 시려졌습니다.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해서
우리 집 식탁이 떠올랐습니다.

서로의 눈을 피하던
조용한 저녁들.
숟가락만 움직이던 식사 시간.

나는 텔레비전을 보며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사실은 텔레비전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비추고, 기다리고,
아무 말 없이 물어보았다는 것을.

괜찮으냐고.
이대로 괜찮냐고.

불빛이 깜빡입니다.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지만,
나는 이제 조금 다르게 봅니다.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고,
말도 많고, 웃음도 울음도 넘쳐나지만
그 속 어딘가에서
나는 오늘, 조용히
나를 다시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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