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백두산 정경 – 눈꽃 한 점의 기억

 

백두산 자락에 섰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였다.

말없이 눈을 굴리던 녀석이
갑자기 눈덩이를 던졌다.
“야, 그때 우리 교복 입고 눈싸움하던 거 기억나냐?”
한 마디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다시
열일곱이었다.

하지만 눈밭 위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세월은 분명히 지나 있었다.
누군가는 무릎을 만졌고,
누군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도 오길 잘했다.”

백두산은 여전히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산 위로는 구름이 흘렀고,
그 속에는
우리의 젊은 날들이 둥둥 떠 있었다.

쌓인 눈, 흩날리는 입김,
덜 굳은 주름살 아래 숨어 있는
소년의 얼굴들.
그때의 우정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에 쌓였던 것이다.

바람이 지나갔다.
그 속에 들꽃 향기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 말 없이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 설산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이 눈꽃 같은 하루는
우리 삶에 또 올 수 있을까.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하얀 산맥이 멀어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어떤 마음은 눈처럼 천천히 쌓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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