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봄, 손주 녀석이 시골에 내려왔다.
오랜만에 마당을 함께 쓸고 있던 참이었다.
녀석이 갑자기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뱀이에요!”
마당 끝 쑥대 밑, 그곳에 조용히 뱀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있었다.
풀잎 사이로 고개를 들어 혀를 날름거릴 뿐, 공격할 기색은 없었다.
나는 손주의 어깨를 가만히 눌러주며 말했다.
“놀랐지? 근데 저놈도 우리 눈치 보고 있는 거야.”
녀석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
“징그러워요”라 했다.
나는 그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젠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뱀은 오래도록 원죄의 상징이었다.
에덴의 유혹자, 독과 음모의 화신.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모든 이미지는 인간이 만든 거다.
뱀은 말이 없다.
땅에 몸을 붙이고,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산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그 모습이 낯설어 두려워했고,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그런 존재들에게서 오히려 인간을 본다.
내 안에도 조심스레 세상을 엿보던 순간들이 있었다.
상처받을까, 오해받을까 싶어 침묵했던 날들.
말없이 감정을 숨기며 살았던 시간.
내가 겪은 시대는 말보다 인내가 미덕이었고,
감정보다 체면이 중요했다.
그렇게 허물처럼 감춘 것들이 쌓이다 보니,
나도 언젠가부터 본래의 나를 잊고 있었다.
뱀은 허물을 벗는다.
그 벗겨진 껍질 위엔 문양이 남는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위협”이라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이
살아낸 흔적, 변화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고통을 견딘 자만이 남길 수 있는 무늬다.
손주는 아직 세상을 배우는 중이다.
빠르게 판단하고, 또 쉽게 단정짓는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 시절엔 그랬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혀를 내민다고 해서,
모두가 해치려는 건 아니란 걸.
나는 바란다.
손주가 살아가며 허물을 벗어야 할 순간이 올 때,
그 껍질 위에도 꽃 같은 무늬가 남기를.
그리고 누군가 그걸 보고 징그럽다 하지 않고,
“아, 너도 살아냈구나” 하고 말해주기를.
지금도 그 뱀은 어딘가의 바위 틈에 몸을 감추고 있겠지.
나는 기다린다.
언젠가 그 뱀이, 그 무늬가, 햇빛 아래 피어나길.
그리고 그 모습 앞에서, 누구도 “징그러워”라 말하지 않기를.
진실이란, 때로 그렇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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