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나는 신뢰를 배달하는 사람입니다-퀵 서비스”

 

다섯 평 남짓한 반지하방,
그곳에서 나는 몇 달을 버텼습니다.
햇볕은 들어오지 않았고,
세상도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사업이 망했고, 가족과 사람들도 떠났습니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남은 건
신용불량자라는 이름과,
받지 않는 전화번호 몇 개뿐이었습니다.

“나는 끝났구나.”
그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날, 마지막 남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게 내 첫 퀵 서비스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오토바이로 물건이나 나르면서 뭘 그리 의미를 두냐고.”
하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처음으로 배달한 건
어린 아이가 기다리는 생일 케이크였습니다.
얼마나 귀하게 들고 갔는지 모릅니다.
박스 위에 떨어질까 봐
내 숨조차 아껴가며 달렸습니다.

어떤 날은
응급실로 약을 보내야 했고,
어떤 날은
지방에서 올라온 고인의 유품을
조심스럽게 가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내가 옮기는 건 단지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정, 안타까움, 사랑, 기다림이라는 걸.

그걸 지켜주는 게 내 일이라는 걸.

어떤 날은 빗속에서
장갑 안까지 물이 찼고,
어떤 날은 배달을 마치고 나서야
손끝이 얼어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일수록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를 향해 달릴 이유가 있다는 건
죽은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니까요.

인생은 목적지가 아니라,
‘도착하려는 의지’ 그 자체가 삶이라는 걸
나는 도로 위에서 배웠습니다.

내가 도착할 곳이 누군가의 안심이고,
누군가의 눈물이고,
기다림이라면—
이 일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말합니다.
“그 기사님이라면 믿고 맡겨요.”

이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나는 다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달리는 매 순간마다 느낍니다.

이제 나는 압니다.
나는 물건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사라질 뻔한 자신을 되찾아준 사람
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달립니다.
비록 이름은 포장지에 적히지 않지만,
그 안엔 나의 진심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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