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소년과 한우, 그리고 컴퓨터 앞의 나

 

어릴 적, 해 질 무렵이면
나는 고무신을 질질 끌며 마당을 걷곤 했다.

어느 쪽 발목이 더 늘어났는지 모를 고무신은
늘 한 짝이 먼저 툭 튀어나갔다.

사랑방 기둥의 그림자가
안마당 절반을 넘기면,
나는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암소의 고삐를 쥐었다.

“가자. 오늘은 네가 먼저 앞장서.”

소는 워낭 소리를 한 번 울리고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나는 풀을 뜯는 소를 지켜보다가
바위에 등을 기대어 책장을 넘겼다.

나뭇잎이 바람에 갈리는 소리,
소의 입에서 풀잎이 찢기는 소리,
그리고 가끔씩 나는 쇠파리 소리.

어느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그 모든 소리가, 내 하루의 배경음이었다.

어느 날은 소가 갑자기 산 아래로 내달렸다.

책을 던지고 뒤쫓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지만,
소는 천천히 돌아와
내 손바닥을 핥았다.

그날 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는 웃었다.

내 무릎보다
소가 돌아온 게 더 다행이었다.

세월은 물 흐르듯 지나갔다.

고무신을 벗고 구두를 신고,
책을 덮고 서류를 들고,
산이 아닌 도시로 향했다.

그렇게 살아낸 세월이 어느덧 이순.

이제 나는 또 하나의 고삐를 잡는다.
이번에는 소가 아닌,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쥐고.

컴퓨터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전 세계를 잇는 신경망,
정보와 감정이 오가는 디지털 벌판.

나는 그 앞에 앉아,
키보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딸깍.
그 소리가
워낭 소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소를 부르듯,
나는 커서를 이끌고
마우스를 밀고 당긴다.

누군가는 이 세계의 흐름을 장악한 자를
‘성공’이라 부른다지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나에게 무엇이 되어줄래?”

한때, 내가 소에게
물을 먹이고 진드기를 떼주던 것처럼
너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도 나는 묻는다.

“기계야, 네가 아니라,
이 속에 담긴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주면 좋겠어.”

화면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소년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 시절, 소는 나를 믿었고
나는 소를 아꼈다.

지금, 컴퓨터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도
나는 이 안에서,
또 다른 나와 마주하고 있다.

마치 오래전,
노을 진 들판에서
소의 등을 쓰다듬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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