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 이름을 붙일 때, 보통은 ‘복실이’나 ‘초코’ 같은 이름을 쓴다. 그러나 우리 집 개의 이름은 다르다. 달빛이 남긴 잔영을 닮아 ‘여월(餘月)’. 시집 속 구절 같다고들 한다. 이름처럼 여월이는 조금 특별하다.
올해로 여덟 살. 혈통서 없는 믹스견이다. 우리는 가르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손!’ 같은 재주는 못 한다. 대신 네 발로 흙을 밟고, 바람 냄새를 맡으며, 개답게 살아간다.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이 우리의 철학이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도 그렇게 두면 집안이 엉망되지 않나요?”
나는 웃는다. 여월이는 한 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다. 가구를 갉지도, 신발을 물어뜯지도 않는다. 오직 자기 장난감만 갖고 논다. 바닥에 간식이 굴러다녀도, 쓰레기통에 뼈다귀가 있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모습은 단순한 훈육의 결과가 아니다. 여월이는 마치 스스로 원칙을 세운 듯하다. “내 것이 아닌 건 내 것이 아니다.” 여덟 해 동안 여월이는 그 선을 지켜왔다. 나는 종종 그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인간인 나는, 내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뻗다 다친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월이가 가장 잘하는 건 ‘바라보기’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가와 눈을 들어 나를 본다. 그 눈빛엔 꾸짖음도 요구도 없다. 그저 고요히, 그러나 깊이 머문다.
밤이면 더 선명하다. 불빛이 눈동자에 박혀, 작은 별처럼 반짝인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인간은 입으로 수천 마디를 흘리지만, 개는 눈빛 하나로 우주를 건넨다는 사실을.
아파트 인터폰에서 “입차하였습니다” 소리가 울리면, 여월이는 곧장 현관 앞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출차하였습니다”에는 귀도 까딱하지 않는다. 떠남에는 미련이 없고, 오직 돌아옴만이 기쁨이다.
우리는 떠남과 도착 사이에서 쓸데없는 감정을 흩뿌린다. 여월이는 단 하나만 붙잡는다. “곧 올 것이다.” 단순한 믿음, 그러나 가장 충만한 기쁨.
물론 단점도 있다.
여월이는 다른 개를 보면 금방 사나워진다. 목줄을 팽팽히 당기며 으르렁댄다. 그런데 막상 상대가 다가오면 다리를 떨고 꼬리를 말아 도망친다. 허세와 겁이 공존하는 모습. 하지만 그것이 어찌 여월이만의 모습일까. 인간도 마찬가지다. 회의실에선 목소리를 높이다가, 작은 반박 앞에 침묵하고 만다. 겁을 숨기려는 몸짓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개를 키운다고 하지만, 사실은 개에게 길러지고 있는 건 아닐까?”
여월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눈 돌리지 않는 법. 바라봄만으로 사랑을 전하는 법. 떠남에는 침묵하고, 돌아옴만 기뻐하는 법. 인간이 평생 배워도 서툰 것들을, 여월이는 이미 체화했다.
여월이는 오늘도 내 곁에서 조용히 누워 있다. 숨결은 잔잔하고, 눈빛은 여전히 맑다. 언젠가 여월이가 나보다 먼저 떠날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여월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눈빛은 내가 살아내는 동안, 계속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볼 테니까.
*관련글 보기
단풍든 저수지에서 떠올린 부모님과의 기억. 먼저 떠난 어머니, 말없이 남아있던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모두 사라진…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가장 깊습니다. 아버지의 무시, 아내의 무관심,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졌지만, 그 아픔…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청년이 항암 치료 중 가을의 은행잎을 바라보며 웃는다.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가 떠나시기 전, 단풍이 진 산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한 남자의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산행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