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물은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싱크대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이
조금씩 스테인리스 표면을 두드리며 만든 둥근 울림을.
물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흔든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고 배웠다.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나도 그렇게 살았다.
몸을 낮추고, 말끝을 흐리고, 가능한 한 덜 튀는 방향으로.

물은 그게 옳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풀뿌리를 적시고, 나무 뿌리에 스며들고, 자갈 틈을 지나
다정한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물.
나는 그게 ‘지혜’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여름,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증기로 솟구쳐
햇살 속에서 반짝이던 순간,
나는 알았다.
물이 위로도 흐른다는 걸.

보이지 않는 물기둥,
그것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일 수도,
숨죽였던 소망일 수도 있다.

물은 솟는다.
산꼭대기에서도, 벌어진 틈에서도,
누구도 예상 못한 자리에서.

나는 이제 질문을 바꾼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아니라
‘언제 치솟아야 할까’로.

세상은 여전히 조용한 물을 좋아한다.

순하되 강한 사람, 젖되 흐르지 않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물은 때로 폭포가 되고, 구름이 되며,
번개를 몰고 오기도 한다는 걸.

나도 그렇다.
조용히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싶다.
묵묵히 바위를 적시던 한 방울이,
천둥 같은 존재가 되는 그 순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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