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산이 어머니를 데려갔다 — 단풍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산행

어머니가 떠난 날, 산에 비가 내렸다.
묘하게 따뜻하고 슬픈 비였다.
마치 산이 조용히 울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는 그 산을 오래 사랑하셨다.
우리 집은 시골의 낡은 단독주택이었고,
집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몇 걸음만 걸으면
작은 산으로 이어졌다.

어릴 때 나는 그 산이 지루했다.
나무는 다 비슷했고,
올라가면 또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르셨다.

“산은 사람 말을 안 해. 그래서 좋아.”

그 말이 어릴 땐 무서웠다.
말하지 않는 존재는 낯설었고,
어머니가 그곳에 기대는 이유를 몰랐다.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이미 병은 깊었다.

서울 병원도 다녀보고, 민간요법도 해보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치료를 거부한 건 아니었다.
그냥, 더는 싸우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옮기시고,
창문을 조금씩 열어두셨다.

“바람 냄새가 좋아.”

그 말은 어느새 어머니의 인사말이 되었다.

가을이 깊어지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같이 한 번만 더 가자. 뒤 산에.”

나는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몸이 기운 없던 어머니는 내 팔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낙엽이 지천에 깔려 있었고,
바람은 너무 조용했다.
그날따라 새들도 울지 않았다.

“이 산도 이젠 다 늙었네.”

어머니는 단풍이 반쯤 물든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예쁘잖아요.”

나는 그렇게 답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산 중턱, 어머니는 작은 돌에 걸터앉았다.
배낭에서 주먹밥 하나 꺼내셨고,
미지근한 보리차를 나눠 마셨다.

그 장면이 내 마음에 그대로 박혔다.

그날,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듬해 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차분한 마지막이었다.
이미 준비하신 얼굴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산에 가지 못했다.
그 산이 너무 무거웠다.
아니, 너무 가까웠다.

마당에서 눈을 들기만 해도 산이 보였다.
눈물도 같이 솟았다.

어느 날, 꿈을 꿨다.

어머니가 산길을 걷고 계셨다.
단풍잎이 발끝에 떨어지고,
바람이 천천히 치맛자락을 스쳤다.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따라,
나는 다시 산을 올랐다.

산은 달라진 게 없었다.
나뭇잎은 다시 물들고,
낙엽은 또 발밑에 깔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산이란 단지 풍경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지막이 머무른 곳,
또 다른 시작이 뿌리내리는 곳이다.

그 후로 나는 자주 산에 오른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남은 어머니를 놓아주기 위해서.

걷다 보면 문득,
아주 짧은 순간 어머니의 기척을 느낀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갈라진 바위에 핀 작은 풀꽃,
주머니 속에 남아 있던 오래된 티슈 하나.

삶은 그렇게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스며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산은 어머니를 데려간 게 아니라,
어머니를 나에게 남겨두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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