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깡장 한 숟갈, 어머니의 불빛 같은 기억을 끓이다

세종 외곽 국도를 따라 달리던 추석 연휴.
한참을 가다 문득, 조용한 휴게소 하나가 길 옆에 붙듯 나타났다.
백제 휴게소.

이름만큼이나 소박한 외관이었다.
호두과자 굽는 냄새가 어렴풋이 퍼지고,
작은 슈퍼 옆, 낡은 식당 하나가 구석에 기대듯 자리하고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익숙지 않은 단어 하나가 메뉴판 옆 안내문에서 눈에 들어왔다.
깡장.

그 아래엔 큼직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된장, 청국장, 고추장을 직접 배합해 일주일간 숙성한 ‘삼합장’.
해물과 야채, 고기, 순두부를 더해
지방은 줄이고 근육량을 늘려주는 건강식이라 했다.

짧은 문장들이었지만,
그 설명 너머에서 오래된 부엌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건 단순한 된장의 향이 아니었다.
시간이 천천히 익어가는 냄새였다.

주문한 깡장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숟가락으로 푹 떠 흰밥에 얹어 비볐을 뿐인데,
그 맛은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혀끝에 번지는 건 오래전의 풍경,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
불빛 아래서 피어오르던 하루의 온기였다.

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 한켠엔 늘 화로가 놓였다.
장작을 태운 잉걸불 위로
어머니는 된장 냄비를 조용히 올려놓으셨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잘게 썬 김치와 파, 마늘,
그리고 달큰한 향을 더하듯 당원은 조심스레 반 스푼만 넣으셨다.
소리 없이 끓어오르는 냄비에서 구수한 향이 났고,
그 냄새가 방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건 향이라기보다
계절을 버티는 냄새,
삶을 지탱하는 냄새였다.

화롯불 앞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늘 말하곤 하셨다.
“이걸로 겨울 넘지.”
그 한마디엔 된장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인덕션 위에서 국을 끓인다.
정교한 조미료로 맛을 낸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맛이라도
장독대 옆 김장 항아리와 잉걸불 위 된장이 내주던
그 안도감엔 닿지 못한다.

그날의 깡장은 단순한 점심이 아니었다.
잊고 있던 시간을 마주보는 일이었고,
익숙한 풍경 속에서 사라진 온기를 다시 느끼는 일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짠맛과 단맛 사이,
나는 문득 아주 오래전 저녁의 방 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음식이란 결국, 한 사람의 기억을
잉걸불처럼 덥히는 것.

깡장 한 숟갈.
그것은 된장이 아니라,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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