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죽서루, 평범함의 비범함 – 삼척에서 만난 시간의 누각

추석 연휴, 오랜 친구 셋이 부부 동반으로 삼척을 찾았다.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고, 산은 가을빛에 젖어 있었다.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도시, 이번엔 발을 붙였다.

세 곳의 명소를 돌았다.
그중 마음에 남은 건 하나, 죽서루였다.

친구가 말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
나는 웃었다.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멈춰 세웠다.
그의 눈에는 평범했지만, 내 눈에는 뭔가 오래된 울림이 있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하나다.
학교 시절, 시험지에 쓰기 위해 외웠던 그 이름.
총석정, 낙산사, 청간정, 망양정… 그리고 죽서루.
그때는 지명일 뿐이었는데,
오늘은 내 눈앞에 세월의 얼굴로 서 있었다.

누각 옆엔 대숲이 있었다.
바람이 스치자,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낮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시의 운율 같았다.
세월이 말을 건다면, 아마 이런 소리일 것이다.

그날 마당에선 창(唱)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판소리의 목소리가 절벽과 강 사이를 가르며 흘렀다.
소리는 멀리서 울려와 누각 기둥에 부딪히고,
다시 대숲으로 스며들었다.
그 한 자락의 음이 공간을 감싸자,
죽서루는 무대가 되고, 시간은 관객이 되었다.

누각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아래로 오십천이 흐르고, 햇살이 그 위를 천천히 건넜다.
기둥의 절반은 암반 위에, 절반은 다듬은 돌 위에 서 있었다.
균일하지 않은 땅 위에서도 조화를 잃지 않았다.
그 불균형 속에서 오히려 완벽함이 피어났다.

나는 신발을 벗고 누각 위에 올랐다.
서늘한 바람이 발끝부터 스며들었다.
멀리서 창의 끝소리가 들렸다.
강물은 느리게 흐르고, 대숲은 바람에 몸을 흔들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침묵 속에 있다는 것을.

죽서루의 이름엔 여러 이야기가 얽혀 있다.
동쪽의 대숲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선녀가 놀던 곳이라는 전설.
그런데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니,
‘죽서루’라는 세 글자 안에서 이미 바람이 운다.
말 속에 풍경이 있고, 풍경 속에 시간이 있다.

친구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래도 영남루가 훨씬 멋있잖아.”
나는 웃었다.
“화려한 건 잠시지만, 깊은 건 오래 남지.”

죽서루는 크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래 바라보니, 조용히 세월을 품고 있었다.
수백 년의 보수와 흔적이 하나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무너짐을 감추지 않고, 덧댄 자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축.
그 모습이 사람의 삶과 닮아 있었다.

절벽 아래로 눈을 내리니, 강물이 누각의 그림자를 품고 흘렀다.
그 그림자는 흔들리면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흔들림도 평화가 될 수 있구나.

누각의 현판에는 ‘관동제일루’라 쓰여 있었다.
그 글씨를 바라보며, 나는 상상했다.
수백 년 전 선비들이 바람을 맞으며 이곳에 시를 남겼을 때,
그들도 나처럼 세월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떠났고,
글씨만 남았다.
그리고 그 글씨 위에 오늘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죽서루는 하늘을 향한 건물이 아니다.
하늘을 품은 마음이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바람과 친구가 된 마음.

돌아오는 길,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괜히 온 건 아니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숲이 대신 대답하고 있었다.

죽서루는 ‘보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잠시 나를 잊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를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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